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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만남의 첫 조건이다

희망으로 2016. 4. 23. 10:28






<외로움은 만남의 첫 조건>


석가모니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1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다름을 말하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바로 그 사람 마다의 '다름'을 

바탕으로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남에 대해 단정하는 것을 지적하지요.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지요. "군자는 무엇인가요?" 

공자는 대답했지요. "군자가 아니면 군자를 알 수가 없다!"라고.


다름은 다른 말로 외로움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그 외로움에 깊이 경험하지 않고 남을 안다고 하는 것은

'동이불화'의 상태입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집단을 이루는 그저 무리일 뿐이지요.


참다운 이해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상대를 만나는 것은

'화이부동'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서로 조화를 이루되 똑같지는 않은 상태.


히틀러에 저항하다 죽음을 당한 본회퍼 목사는 그 의미를 이렇게 말했지요.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은 함께 어울릴 수 없다.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지, 어떤 상태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공동체에 도피하듯 참여하게 되면 필시 공동체에 해를 끼치게 됩니다.

자기의 유익과 필요를 위해 공동체를 흔들거나 패를 만들게 되고 불평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홀로서기를 애쓴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불어 살기를 추구했습니다.

석가모니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본회퍼목사도. 그외 많은 분들이 그랬지요.

스스로 1인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하는 것은 진정한 홀로서기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고독은 본질이고 숙명이고 바탕이지만 결코 고립을 향하는 길이 아니지요.


가장 훌륭한 본보기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향을 보여주고 길을 표시는 했지만 스스로 길 자체는 아니었지요.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못박아서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위에서 죽을 것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괴로움을 알고 아무도 이해도 도와주지 못하는 철저한 고독 상태인 자신의 존재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버리시나요? 피할 수 없나요? 라면서도 스스로 결단으로 그 길을 갔지요.

예수는 생명을 바쳐 길이 되었고 진리가 되었고 부활로 생명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하지 못하고 한 적 없는 길, 진리, 생명 자체가 된것입니다.


홀로서서 자신의 고독을 많이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남들이 가진 고독을 압니다.

그래서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도 더 알고 더 힘써 살게 되나봅니다.


외로움은 만남의 조건이고 인정해야하는 첫번째 교양단계입니다.

결코 고개돌려 없는 척 외면하거나 수치스러운 결점 쯤으로 숨길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외로움을 알고 인정하고 털어놓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첫번째 조건입니다.

불행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새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복된 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