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슬픔을 팔아서 꽃밭을 살까...
<이 슬픔을 팔아서 꽃밭을 살까...>
- 나는 무기수다. 내 징역에는 석방일자가 없다.
TV 아침 방송에 영상앨범 ‘산’ 이 나온다. 산티아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내 속은 소리 없는 통곡이 올라왔다.
‘저들은 저렇게 맘의 원대로 걷고 걸으면서 앞으로 가는데 나는 지금 뭘 하나...’
이어서 귀촌을 한 사람들의 땀과 웃음이 시골을 배경으로 퍼져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열심히 산다. 기쁘게 산다. 건강하다. 한 때는 나도 꿈꾸었다 그런 생활을.
‘그런데 나는 허리가 잘린 한반도처럼 중단된 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지?...’
밤새 두 시간, 세 시간 마다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면서 깨고 다시 누웠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데 방법이 없고 길이 없다. 문 없이 사면이 벽만 있는 방에 갇혔다. 정말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이 날들이 언제까지 가는 걸까? 끝이 없으니 무기수다. 무기수의 징역에는 석방일자가 없다.
- 계절이 와도 슬프고 계절이 가도 슬프다.
발치 앞에까지 가을이 왔다. 여기저기 가을꽃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이 서늘하다고 사람들이 엄살도 부린다. 곧 높은 설악산에서부터 단풍이 시작하여 내려오고 도시를 점령한 후 지나갈 거란다. 작은 개울같이 세상과 나를, 계절과 나를 갈라놓은 투병하는 아내의 남편노릇. 자유란 턱도 없는 호사다. 나들이란 그림의 떡이다. 그냥 사진을 보고 추억을 뜯어먹으며 버텨야 하는 벌을 받는 중이다.
감사만 하고 살기에는 많이 속상한 현실들이 발을 잡고 그렇다고 원망만 하고 살기에는 분명 내 형편이 최악은 아니다. 나도 그 정도로 억지를 부리는 몰염치한 신앙인은 아니다. 다만 계절이 와도 슬프고 계절이 가도 슬플 뿐이다.
- 나도 춤추고 배 두드리고 퍼질러 잘 줄 안다
“그 정도 고민이라면 나 같으면 춤도 추겠다.” “그 정도 가난과 쪼달림이라면 나 같으면 배 두드리며 살겠다.” “그 정도 외로움이라면 나 같으면 몇 시간쯤 데굴거리다 퍼질러 잠도 들겠다.“
내 분노에는 까닭이 없고 욕을 퍼붓고 싶은 대상에는 구분이 없다.
그러나 어쩌랴, 누군가는 자기 힘겨움을 가지고 나처럼 그 말들을 나에게 반사시키며 한숨짓는 것을. 세상의 고통에는 위아래도 등급도 없는 것을. 각자 자기 짐을 지고 깔려 죽기까지 가장 힘든 사람이 자신들인 것을.
- 안식일에 안식이 없어 몸부림치는 중생이 있다.
이정우님의 ‘이 슬픔을 팔아서’ 라는 시가 있다. 이 시를 내가 좋아하는 로제리오 김정식 형이 작곡해서 불렀다. 아주 가을 햇살처럼 맑고 투명하게, 그러나 가슴 저미는 음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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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픔을 팔아서 / 이정우
이 슬픔을 팔아서 조그만 꽃밭 하나 살까. 이 슬픔을 팔면 작은 꽃밭 하날 살 수 있을까.
이 슬픔 대신에 꽃밭이나 하나 갖게 되면 키 작은 채송화는 가장자리에 그 뒤쪽엔 해맑은 수국을 심어야지.
샛노랗고 하얀 채송화. 파아랗고 자주빛 도는 수국, 그 꽃들은 마음이 아파서 바람소리 어느 먼 하늘을 닮았지.
나는 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마한 꽃밭 하날 살거야. 저 혼자 꽃밭이나 바라보면서 가만히 노래하며 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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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매매가 불가능하고 꿈도 꾸지 못하는 삶이 계속될까? 갇힌 자들의 고통을 한숨을 더 공감하라는 하늘의 명령일까? 이 고통을 바라보다가 못 견딘 하나님이 그래서 끝을 내고 싶어 아들을 보내신 걸까? 그럼에도 끝나지 않은 이 세상의 질긴 고통 외로움 슬픔들이 참 미우시겠다.
나도 이 슬픔을 팔고 싶다. 꽃밭을 사든지 희망을 사든지. 그곳에 낮고 작은 채송화도 심고 수국도 심어야겠다. 가녀린 줄기로 꽃을 피우고 생명을 이어가는 나팔꽃도 심고.
안식일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중생을 하나님이 발견하시고 대책을 세울 때까지 버티면서. 혹시 다시 아들을 또 보내주시려는지 누가 알랴, 뽑기처럼 한 번 더, 그 날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하시더라만...
(로제형은 이 노래에 대한 글을 쓰면서 끝에 이렇게 말했다. '갇혀있을 것인가? 풀려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스스로의 몫이다' 라고, 참 얄밉게도 경우바른 소리를 한다. 전화로 좀 따져야겠다. 꼭 그렇게 말해야겠냐고! ...그런데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자신이 없다. 전신을 불 고문하듯 터지는 난치병 루프스를 안고도 웃고 노래하며 사는 형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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