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으로 용도를 변경하면 안된다
<무단으로 용도를 변경하지 말자!>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기쁨과 짜증
“국어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야, 국산 맥주는 제 원료가 안 들어가서 오히려 수입맥주보다 비싼 셈이라고, 근데 내가 무심코 ‘맞아요!’ 그랬어“
“응, 그랬구나,”
그런데 대꾸를 하고나니 좀 이상했다.
“가만, 뭐지 이거?...,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흐흐 국어 선생님도 좀 지나서 휙 돌아서서 ‘누구야! 대답한 사람?’ 그러더라!”
“분명 문제 있는데, 그냥 넘길 일이 아니야! 그 말은 두 가지를 다 맛보지 않으면 비교할 수 없는 대답인데... 1번 경험, 2번 버릇, 3번 습관, 4번 중독! 어느 거야? 솔직히 말해!“
“아, 아냐! 절대, 네버! 믿어줘! 인터넷에서 보았단 말야! 씨....”
(딸아이는 6개월 후면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된다. 맥주 한 잔 마시는 거 따라다니며 말릴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도 않다. 자기를 자신의 가치관이 감독해야지 아무리 부모라 해도 남이 무슨 재주로 할 수 있다고, 그것도 평생을. 나중에 아이도 친구 집에서 딱 한 모금 마셔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뭐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가 나는 좋다. 신뢰도 하고!)
그런데 이 이야기를 아이 학교에서 태워오면서 나눈 지 딱 이틀만인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났다. 아내 약을 챙겨 먹이면서 ‘내가 당신에게 뭐야? 1번 머슴 2번 남편 3번...’ 하다가 문득 내가 이런 비슷한 이야기 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도무지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다.
“뭐였지? 당신에게 이런 비슷한 거 한 번 했는데?”
“모르겠는데...”
기억하고 보니 딸에게 한 말이었다. 요즘 내가 늘 이런 지경이다. 머릿속이 바둑판이다. 깜깜하든지 새하얗든지 둘 중 하나다. 뭐 어차피 어느 쪽이거나 별 도움이 안 되는 색깔이기는 마찬가지다. 하루만 지나면 무슨 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러면서도 참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다만 뭔가 있었는데 하는 흔적의 기억은 또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메모를 한다. 전화기가 참 편하다. 알람도 무언가 살 품목도, 누구와의 약속도, 불쑥 생각나는 글감들도 모두! (이러다가 전화기 사라지면 나는 고장 난 깡통로봇이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속 편하게 살라고 싹 지우시나보다. 아님 전혀 도움 안 되는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보셨든지! 흐흐’
아마도 늙어가는 서러운 증상중의 한 가지일거다. 몸도 여기저기 최상에서 조금씩 떨어지고 삐거덕거리고 고장 나는 데 마음인들, 정신 기능인들 안 그럴까. 그런데 이런 나이 먹어 서러운데 한 술 더 보태는 아이들.
‘이게 뭐야? 이 꼴이 뭐야! 내가 지네들 머슴인가? 어이구...‘
아들은 안하던 육체노동 아르바이트하느라 아침 일찍 가고 밤늦게 녹초 되어 돌아온다고 쌓아놓고, 딸은 손가락 하나를 알미늄 기브스 해서 열흘째 물에 손 못 댄다고 냅두고... 씽크대 수북한 그릇들을 정리해달라고 S.O.S를 보내왔다. 아침 일찍 아이들 자취방으로 가서 설거지 해주다 힘들어 투덜거렸다.
‘마누라 아파서 간병하는 건 운명이다 내 책임이다 치고, 이제 아이들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하나? 에이....‘
그런데 아마도 아이는 많이 고마워하고 이런 아빠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할거다. 내가 어떻게 투덜거리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그러고 보니 무슨 마음으로 어디를 보느냐, 누가 중심이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병이 나으시면 뭐가 가장 하고 싶으세요?”
“가족들에게 따뜻한 밥 지어 한 번 먹이고 싶어요.”
아내는 몇 번인가 신문 방송 인터뷰에서 병이 나으면 애들 따뜻한 밥 한 번 직접 해먹이고 싶은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런 것도 소원이 되나? 반대로 나는 충분히 그렇게 해줄 건강도 있고 시간도 있다. 전에는 방 한 칸도 없어서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아이들 자취방도 있어서 환경도 된다.
그런데 할 수 없는 아내에게는 꿈같은 소원이, 할 수 있는 내게는 귀찮은 일거리처럼 느껴진다. 왜 그럴까? 민망하게. 아마도 아내에게는 밥 먹는 아이들 얼굴과 기뻐하는 모습만 떠올리고, 나는 쌀 씻고 차리고 치울 일감만 떠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는 소원이 누구에게는 일거리가 된다. 마음 하나 다름으로 생기는 천지차이 기쁨과 짜증이다.
2. 산 넘어 산, 강을 건너고 언덕을 넘는 길이 좋다.
메르스 때문에 거의 두 달을 외출도 금지 면회도 금지인 채 고생했다. 간신히 풀려서 벗어날만하니 폭염 무더위 열대야 등으로 또 꼼짝 못하고 고생이다. 참 끝이 없다. 인생이 매양 그러하듯...
총각 때는 외로워 죽을 것 같아서 기도했더니 아내를 만나게 해주었다. 덕분에 결혼하고 아이들도 생기고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참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욕심인지 그러고 나니 가장노릇 아이들 양육에 살림에 치고, 이제는 가족 간병에 치여 또 죽을 것 같다고 불평이 생긴다.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덕이 별거 아니고 막상막하다.
이 땅의 어느 누군가는 아직도 외로워 죽을 것 같아 원수라도 같이 살았으면 하고 기도할 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렇게 서로를 부러워하고 사람의 욕심은 단계를 넘어도 끝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일은 산 넘어 또 산, 첩첩산중을 넘는 길이라고 불평이다. 가로 막는 내도 건너고 큰 바위를 돌아 언덕도 올라야 한다고 헥헥거린다. 게다가 비오고 바람세다고 또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들이 다 없어지면 좋기만 할까? 산 하나를 넘고 나서 천리 만리 평지만 나오고 죽을 때까지 그런 길만 가게 되면 더 좋을까? 거기에 내도 바위도 언덕 하나도 다시는 없다면. 그리고 비도 바람 한 점도 불지 않는다면 마냥 신만 나서 걸어갈까?
내가 나그네고 누가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두 번 생각도 할 필요 없이 바로 선택한다. 산 넘어 산, 강물도 가로막고 비오고 바람 불다가 해 쨍쨍한 길을!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 끝까지 못가고 힘들어 쓰러질지언정 가다가 질려서 죽고 싶지는 않다.
지금 산 넘어 산 그런 길을 가고 계신다구요? 그럼 제대로 가시는 거 맞습니다! 흐흐
3.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는데...
“왜 그렇게 쳐다봐요?”
“예? 아뇨! 그게 아니고 그쪽에서 저를 보시니까...”
내가 봐도 그랬다. 그 여자 분은 죄가 없는데 당황스럽겠다고.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서 병동으로 올라오는 자리. 그 안에서 휠체어를 탄 아주머니 한 분이 서 있는 여자에게 몹시 기분 나쁜 목소리로 따졌다.
자세히 보니 병동복도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다시피 고함을 지르고 앙칼지게 소리치는 그 아주머니였다. 뇌경색 때문인지 얼굴이 마비되어 한쪽으로 좀 이상스럽게 보였다. 문제는 그 모습이 남들에게 비친 정도보다 당사자인 본인에게 더 심각하고 우울한 반응을 나오게 했다. 예민하고 열등감 깊은 심정으로 누가 웃거나 소곤거리면 곧잘 신경질적인 태도가 나타났다. 나도 처음에는 많이 기분 나쁘고 꺼림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기도 하고 조금은 편해졌지만.
종종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모습이다. 그 바람에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장애인을 더 기분 나빠하거나 괴물의 한 종류처럼 대하기도 한다. 건강한 사람과 불편한 사람 사이에 갈등과 악순환을 부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작 같이 지내면서 서로 알게 되면 마음이 참 따뜻한 구석도 보게 되고 그러면 상처 입은 연약한 사람이구나 하고 사랑을 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실 살다보면 누구나 그 입장이 되거나 장애인의 가족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서로를 힘들게 한다. 어떻게 하면 그 괴롭고 서먹한 열등감 예민함에서 서로 벗어날 수 있을까? 자주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러워질 수 있는데도 잘 안 되는 아쉬움을.
4. 살면서 겪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만들기 훈련
남포교회 박영선목사님은 성경(히브리서 12장 4-8절)의 ‘하나님은 자녀를 징계하신다’는 구절 중 ‘징계’ 단어를 ‘자녀 만들기‘라고 바꾸어 읽어도 된다고 하셨다. 또 만약 서로 상관하지 않는 사이라면 그건 사생아라고 했다. 아비 어미가 없거나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자식 만들기를)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자식으로 만드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자식으로 만들어지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자식으로 만들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4-7)
8. 징계(자식 만들기)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고난을 자녀가 되는 고단한 훈련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식은 어린 아이로 영원히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라야 합니다. 몸만 자라면 되는 게 아니라 인격과 정신도 자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고된 훈련입니다. 왜냐면, 그가 무지한 채로 아무런 준비와 훈련 없이 훌륭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만들어야 하는 인격적, 정신적 성숙에 가장 필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덕목은 가만히 있어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주 오래 남는 말씀 하나는 이것이다. 신자는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고난을 겪는 모습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겪는 모습이 어떻게 다른 지를 보여주는 사람들.’ 이라고. 신자들은 고난이 닥치면 깊이 묵상하며 힘을 내야할 귀한 기준이다.
5. 무단으로 용도를 변경하지 말자!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들, 아내나 남편, 아이들 혹은 친구 이웃도 내게로만 향한 시선을 기준으로 보면 종종 괴로움의 대상들이다. 마음이 맞다가도 어긋나고 취향도 다르고 죽 맞아 웃는 날보다 피곤한 날이 더 많을 게 너무 당연하다.
사람이 가진 욕심과 기대가 어디 만만하던가? 우리 모두가 날마다 체험하고 확신하고 반복하는 일들이 아니던가? 숱한 갈등과 미움들이 더 이상 팽팽할 수 없어 터져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바깥을 향해 폭력이나 살인이 되기도 하고 찌르는 창이 되어 남의 가슴을 찢어놓기도 한다. 그 반대로 내가 당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는 고단함이라니...
그럼에도 어머니들은 자녀를 위해 모진 고생을 기꺼이 감수하며 오히려 행복으로 여긴다. 참 신기하다. 어머니도 사람이 분명한데도. 단지 시선이 상대를 향해, 무게 중심을 옮긴다는 그 하나로 일어나는 기적이다. 시선과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그 하나만 해내도 괴로움이 많이 사라지고 기쁨이 늘어날 것이다.
내게는 아픈 아내가 그렇다. 귀찮게 만드는 아이들이 또 그렇고 신경 쓰이게 하는 이웃들이 그렇다. 그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용도가 아니라 내가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살 때 나도 덩달아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다고 고단함이 끝나고 행복만 가득하지는 않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닥치고, 가로 막는 강을 건너면 또 험한 바위와 언덕들이 나타난다. 허덕이며 가는 동안 비도 쏟아지고 바람은 때리고 적막한 어둠도 덮는다. 그럼에도 그 길이 좋다. 언뜻 더 좋아 보이지만 나쁜 길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의 길이다. ‘예수 없이 크게 성공하는 것은 크게 망하는 길이다’고 했던 스펄전 목사님의 말처럼.
하나님이 실행하시는 ‘자녀 만들기’ 순간들을 잘 받아들이고, 나도 그 고단함을 훈련으로 견디며 제자리를 지키며 사는 것이 나의 바른 용도라고 생각한다. 그 자리, 그 길을 떠나 벗어나는 것은 무단으로 용도를 변경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부모님의 ‘자식 만들기’ 징계를 피해 가출하여 스스로 사생아가 되는 길과 같다.
무단으로 용도를 변경하지 말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만 한다고? 아니. 때로는 미워도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만 한다고? 아니. 가져도 가신다.
하나님이 고통을 걷어주고 없애주기만 하는 분이라고?
아니!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고통을 주시기도 하는 분이다.
하나님이 기쁨과 만족만 주신다고?
아니! 종종, 그리고 아주 긴 역사를 거치면서 슬픔과 부족함도 주시는 분이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동행을 하신다.
기쁨의 환성만이 아니라 눈물과 신음에도.
고통이 사람에게 오는 이유, 생기는 원인이 이렇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우리가 인생에 바라는 것과 하나님이 바라는 것의 차이,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곳과 하나님이 가기를 원하는 곳의 다름
그 차이에서 고통이 생긴다고...
우리 또한 어쩌면 모두 비겁한 신자일수도 있다.
신자의 모습을 보면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지마시고 우리 주문대로 해주세요!’ 하는 신자고,
또 다른 부류는 속으로 믿지 못하여 ‘내가 해결해야지’ 하고 불안하며 사는 신자다.
둘 다 사실은 하나님을 작고 영향력이 없는 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으면 자기에게 양심적으로 물어보자.
정말 하나님 때문에 인생의 모든 근심에도 불구하고 푹 잠에 드는 평안을 누리는지!
아니면 반대로 무당을 믿는 정도로 터무니없는 행운만 기다리는 맹목적 신자가 아닌지!
두 가지 모습을 벗어난 신자라면 정말 하나님과 가까운 신자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