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자폭을 하고싶은 날...
<지구와 자폭을 하고싶은 날...>
1. 화 발동걸기 하나.
“또 그래?...”
내일 멀리 외래병원을 검사하러 다녀올 동안 필요해서 시술한 아내의 소변주머니가 지난번처럼 싸구려 불량품이다. 호스를 잠그고 여는 깍지 프라스틱이 칼날같이 예리해서 금방 짤릴 것 같다. 지난번에도 그래서 소변이 줄줄 새는 것을 꼭 부여잡고 간호사실에서 새로 와서 교체했는데...
“이번 구입한 제품이 좀 문제가 있나 봐요...”
지난번에 분명히 간호사가 그랬다. 그리고 두어 달 지났는데 여전히 싸구려 조잡한 중국제품이 그대로 또 시술되었다. 하기는 사놓은 개수가 하나둘 아니고 비용줄인다고 원무과에서 밀어붙일 거라는 짐작이 쉬 온다.
불안하다. 그리고 슬슬 화가 난다. 멀리 차로 이동 중에도 잠갔다 열었다 해야하는 데 중간에 찢어져서 소변이 주르르 새면 옷이랑 차랑 엉망이 되고 운전 중에 어쩌지도 못하는데 도무지 신중하게 생각도 않고 환자의 애로점은 고려도 없다. 이 제품이 여기만 들어올 리 없고 처음 것만 그럴 리도 없고 대한민국 작은 요양병원들이 태반 그럴 거다.
‘망할 놈의 돈 욕심에 지랄 난 나라...’
2. 분노게이지 올리기 둘.
지난번 외래병원을 다녀올 때 평상시와 달리 병원의 주문이 있었다.
“이번에는 보험공단 부담금 빼고 환자 부담금만 내고 오지 말고 병원수납을 100% 전액 본인으로 내고 오세요. 그리고 영수증이랑 병원비 내역서 가지고 오면 한 달 뒤에 입원한 요양병원에서 환불해줄겁니다.”
도대체 왜 그런 복잡한 과정을 요구하는 걸까?
알고 보니 건강보험공단 심평원의 지시란다. 입원환자의 경우 외래병원을 다녀오면 두 곳에서 보험공단 부담금을 계산하게 되니 입원중인 한 병원에서 비용을 떠맡고 나중에 보험공단에 돈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한단다.
‘그러니 이중 처방을 방지한다고 말하지만 와닿는 건 업무편리성 얼마라도 공단부담금을 늦게, 조금 주려는 심산으로 느껴진다.’
환자본인부담금을 예전에는 300만원이든 1000만원이든 본인이 먼저 병원에 납부하고 나중에 연말정산해서 통장으로 환급해주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개인이 일단 부담하는 부담금도 없는 사람에게는 무리라고 줄여준다는 취지로 한도액을 넘으면 큰병원에서 아예 납부도 하지않고 제외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가난하고 현금마련이 부담스러웠던 사람들에게 참 반가운 제도였다.
그런데 그 취지와 180도 뒤로가는 이 새로운 요구는 뭐지??
이전 방식이라면 100만원 병원비면 대충 10만원 정도 선만 납부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100만우ᅟᅯᆫ을 다 내고 영수증을 받아와서 입원중인 병원에 내고 한달을 기다려야 한다. 돌려받을 때까지... 그게 MRI나 항암주사, 비싼 검사라도 하게되면 300도 되고 500도 되는 경우도 있다. 그 돈을 마련해서 일단 내고 오라는거다.
‘미쳤나? 세상이 뒤로 가는 게 유행인가? 더위 먹었나?...’
그래도 그렇게 햇다. 심평원에 대면 병원은 ‘을’이고, 병원에 대면 환자가 ‘을’이니... 대들 수가 없다. 오래된 환자는 더 기가죽고 눈치가 보인다. ‘제기랄, 더러운 보건복지정책, 보험공단 심평원...‘그러고 욕이나하면서.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달라졌다.
아예 약도 타지 말고 처방전만 가지고 돌아오란다. 그리곤 입원하고 있는 재활요양병원에서 주는 약으로 먹으란다. 안 그러면 환자등급을 최하로 내려서 제대로 공단급여를 못 받게 되거나 심하면 퇴원조치 시킬지 모른다고.
“이게 무슨 미친 끝을 보여주려고 하는거지? 모든 병의 모든 약을 이 작은 요양병원에서 다 갖추고 있지도 않는데, 아무리 유사성분 대체제조를 한다고 해도 너무 무리지 않나? 아예 환자가 무슨 부작용이 나든지 맞지 않아 고생을 하든지 상관없다는 건가?”
똑같은 약을 제때에 다 줄수 있냐고 원장님에게 물으니 난색이시다. 그래서 심평원으로 사람이 갔다고 한다. 이의를 제기하러. 하지만 칼자루 잡은 사람들이 번복하거나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 쉽게 ‘아, 그러세요’ 할거면 아예 시작도 않고 공문도 안 보낸다. 아마 그냥 강제 진행으로 결정날 것이다.
‘하다 하다 별 방법을 다 만들어 내는구나. 어떤 이유로 어떤 작자들이 또 이런 걸 만들어내는 걸까?‘
뒤져보니... 역시 돈(공단부담금 예산 절약), 문제다. 그런데 명분은 부정급여를 타내는 일부 용양병원과 중복으로 약을 지어먹는 무식 불순한 보호자나 환자를 막는 거란다. 잘못하는 병원은 실사와 감독을 철저히 하면 되고 이중으로 약타먹기 좋아하는 환자는 중지시키든지 그냥 먹고 죽게 내버려두던지... 그 이유로 대한민국 용양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면서 종합병원으로 검사와 진료, 약을 타러 다니는 사람들 전부를 통제해서 구석으로 몰아넣겠다니. 이런 발상을 하고도 원망 듣지 않고 벼락 안 맞는 나라에 살아서 니들은 좋겠다.
근거가 된 기사가 이렇다.
[...수원지원 관계자는 “요양병원 내에서 처방이 가능한 상병에 대해서도 원외처방을 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면서 “현재 해당 병원들을 중심으로 집중심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심사를 통해 적정진료 및 정확한 청구가 이뤄질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생략) - 데일리메디 기사 중]
그리고 결론은 이렇다. 이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목적은 돈 절약, 방법은 강제 통제하고 심사강화...
대상은 ‘의료급여’를 받는 저소득 극빈층이다. 돈 많고 병원 입원으로 굳이 후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다 제외다. 늘 이런 식이다. 가장 대책이 없고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늘 타겟이 되는 정책들. 보험공단의 <지출의 효율적 관리>란 괸리대상에게는 줄이고 막겠다는 칼날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허울 좋은 표현...’
우리가 가는 국립암센터는 전국에서 온다. 그 중에는 계속적인 치료가 필요하거나 아내같은 희귀난치병의 증상들로 집에서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환자들도 있다. 숱한 작은 재활병원의 환자들 대부분이 장기치료를 요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이 동네나 입원중인 요양병원에서 검사와 진단, 약처방이 다 가능하다면 왜 먼 곳을 죽자살자 올까? 몇 년씩이나 비용 시간 고단한 몸을 이끌고... 이쯤 되면 목구멍에서 ‘미친 xx들!’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콱 작살이 나버렸으면 좋을 나라, 집행자들!’
3. 한 방에 불 싸질러버리고 싶어지게 하는 나라.
이런 종류의 야금야금식 목조이기는 병원 실무자나 원장님하고 멱살잡고 싸워서 될 문제가 아니다. 그럼 보험공단이나 장애등급판정부서, 심평원이나 뒤집으면 해결이 될까? 물론 그들이 모두 사용되어지는 도구들이야 맞지만 더 뒤에, 더 높은 곳에는 정말 사람이 중요하지 않고 탐욕과 권력이 더 중요한 주범들이 있다.
그들이 비위를 맞추고 눈치를 보는 기업 제약사 집단들이 있고 그들과 하나되어 목조르고 억제하고 삭감시키며 고통을 떠넘기는 피해자들과 물과 기름처럼 존재한다. 그러니 얼마나 단단한 벽이든가, 좀 힘이 되고 내용을 밝혀 줄 언론이나 방송도 이미 꼬리치는 푸들이 되어 대를 이어 세대를 내려온 지 한참이나 되었다. 어디에 기대를 하고 무엇을 의지할 수 있다고...
고단한 막다른 투병의 삶, 버티는 가족들의 정신은 바닥을 친다. 이게 무슨 끙끙 맬 80키로 쌀가마니를 지고 있는 육체적 감당도 아니고 창으로 죽어라 찔려 생사가 급박한 고문도 아니지만 살 의욕이 없어지게 한다. 지치고 싫증이 난다.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보람을 가져올까 싶다. 질리는 데는 약도 해결책도 없다.
살기 싫다. 그런데 나만 죽으면 병든 가족은? 남은 아이들은? 답이 없다. 가슴 아픈 이별이 끝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한 방에 모두가 사라진다면 그런 고민도 미안함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냥하나로 이 나라가 터져서 분해되어버릴 폭탄이라도 장치가 되었다면 미련 없이 불을 붙여버리고 싶다. 꼴 난 부자 가난한자,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분도 억울할 것도 없이 싹 사라져버리게. 그 마당에 칼자루 휘두르는 자리든지 칼날 맞는 자리든지 무슨 구분이 남을까 싶다. 생각만 해도 통쾌하다. 미련 없이 사라지는 그 순간이라니!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이 나라야 그렇게 사라진다고 해도 아이들 형제들, 직장동료로 외국에 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생이별과 남겨진 문제는 여전히 고통스러울테니. 요행히 바깥에 나가있던 비인간적 상류층들이 돌아와 또 그 지경을 만든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을까? 그럼... 방법은 이 지구전체가 사라져야 할 것 같다. 혜성이라도 날아와 손 쓸 수 없이 충돌하고 가루 먼지만 남기고 인류가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죄인 의인 구분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문제고.
4.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 잔인하다.
사람들이 그런다. 그래도 죽지 말고 살아야한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 좋은 단체도 있다고. 그러면서 교회와 신앙을 말한다. 하나님이라면 몰라도... 교회는 꼭 그렇지 않더라.
교회는 참 잔인하다. 말로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오고, 힘 있는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건강하거나 병든 사람이나 상관없다고 한다. 똑똑해도 무식해도 괜찮다고도 했고,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믿고 문턱 없이 너도 나도 다 넘어서 교회로 들어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편치 않은 끼리끼리가 생긴다. 처음에는 공무원 고소득자 사람들과 근근이 먹고사는 일용직 또는 저소득 부모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 안전한 울타리도 완충지역도 없이, 때로는 사랑이나 겸손으로 하나 되는 감동도 받지만 계속 한쪽으로 흐르는 사랑은 사랑도 편치 않게 된다. 겉으로는 평등하고 서로 깍듯이 하지만 잠시만 지나면 서로가 다 안다. 교회 안에도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머문다는 것을.
“김장로님, 이번 주는 어디로 라운딩 가십니까? 같이 갈까요?”
“아, 교수님. 이번 주는 오페라 공연을 보러갈 예정인데 같이 가실래요? 제가 대접하지요!”
“참, 지난 번 새 집으로 이사하셨다면서요?”
“예, 둘째 아이가 결혼하면서 같이 지내고 싶다고해서 더 큰 집을 하나 구해 이사했지요.”
뭐 그렇고 그런 비슷한 사교의 대화들이 오가고 차림새나 화제의 수준이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 둘씩 다른 자리로 모인다. 물 흐르듯 오래 되면 그렇게 편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변변치 않은 이야기들, 내세울 교양미도 딸리고, 더구나 기쁜 일은 고사하고 걱정의 차원도 다르다는 것을 한두 번 느끼게 되면 털어놓기도 부담스럽다.
그렇게 인종도 죄도 차별 안한다는 기독교의 정신 아래 어쩌면 평생 안보고 살았으면 더 마음 편했을 사람들을 한자리에 앉히고 외롭고 주눅 들게 한다.
자식자랑하다가도 수준이 다름을 알고, 질병이나 실직 등으로 수입이 끊기고 곤궁해지고 고민을 등에 지고 다닐 정도가 되면 주일이 오는 것이 괴롭다. 웃는 사람들 얼굴 마주치는 것이 점점 두려워져 마침내 더 아프거나 피치 못할 일이 생겨 핑계를 대고 교회를 빠지게 되는 날이 더 편해진다.
하나님은 주구장장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의 영혼이고 낮고 천한 사람 죄인들을 더 사랑하신다지만 아무래도 아니다. 하나님은 넉넉하고 번듯한 차림새를 더 좋아하고 날 때부터 유리한 사람들에게 복을 더 주시는 게 분명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가난하고 망한 집에 태어난 자식들은 어려운 스타트라인에서 제대로 경쟁도 안되고, 그 물려받는 핸디캡들은 또 직장이나 환경의 열악함을 낳는다. 어떻게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자매라면서 땀내 나고 눈물자국 난 얼굴로 부등켜 안을수 있겠는가. 잠시는 모르겠고 한 두 번은 모르겠지만. 상당히 초월하고 따뜻한 신앙인고 있고 목회자도 있지만 십분의 일도 안되는 소수고 힘 약한 목회자들이다. 그러니 전체 기독교를 대표할 여력이 없다. 물 흐름을 바꿀 수준도 안되고...
오히려 냉정하고 외면하며 각자 살 길을 찾아 싸우는 비정한 도시의 세상보다 더 서글프고 더 외롭게 한다. 밝은 명암 배경 앞의 시커먼 존재란 더 어두워 보이는 법이니까.
아무래도 다른 하나님을 찾으러 가야할까? 우울하고 슬퍼진다.
5. 죽음의 충동을 가라앉히는 숨어계시는 하나님
돌아보면 괴로운 추억들, 지금, 곁을 보면 억울한 상황 두터운 벽들, 내다보면 암담하고 질식할 것 같은 절망감...
누가 지구를 멸망시킬 폭탄의 심지라도 내 손에 쥐어 준다면 미련 없이 불을 붙이고 싶다. 그럴 수 있다. 아니면 밤낮 지구와 충돌해서 지구를 흔적도 없이 가루로 만들어 우주에 뿌려버릴 혜성이 오기를 빌고 빌든지.
쉽사리 고운 전망도 안보이고 평안할 환경도 불가능해보이지만 살아 있으니 하루씩 살아야한다. 그러다 지치면 도 죽음을, 자폭을 꿈꾸고...
그리 쉽게 사람에게서 희망도 비전도 발견하지 못해 힘들어하다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이 있다. 아니 말만이 아니라 생각도 감정조차도 뚝! 멈추어지는 것. 생떼 같은 자식들을 하루아침에 잃고 불편이니 서운하니 그런 말도 호강스러운 이별을 당한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그들에게는 불편 부당한 병원도, 내리막길을 달리는 싸구려 비인간적 복지정책조차도 뜬구름일거다. 한 번 당해볼 기회도 가지지 못했으니, 자녀들과 함께 지낼 수만 있게 해준다면 얼마든지 감수하고도 살 수 있을테데. 그러지 않을까?
그러니 아무 말도 자폭의 충동도 차마 미안하고 염치없어서 내려놓고 토설물을 도로 삼키듯 목구멍넘어로 넘기고 내일 또 내일도 살기로 한다. 보건복지부가 지랄을 하든, 지도자가 거꾸로 홀라당 광인의 발악을 하든지. 교회가 치맛자락을 들고 무슨 장사를 하든지, 상관없이 옷깃을 여미고 생명을 이어갈란다.
미안해서, 마음아파서, 더 큰 억울함 앞에서 도리를 다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