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이웃집 아저씨가 더 좋다?
<때로는 이웃집 아저씨가 더 좋다>
“공부하기 싫어...”
“어쩌다냐? 친구랑 수다도 떨고 놀기도 하고 그렇게라도 때워”
“학교도 가기 싫어”
“.......”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속으로 최면을 걸 듯 되풀이 햇다.
- ‘지쳐서 그러는 거겠지, 고3 수능준비 시험 스트레스로... 이해하자, 이해하자.’
“집이 너무 더워!”
“선풍기 켜고 자지.”
“그럼 선풍기도 안 켜고 덥다고 할까봐!”
“창문 조금 열고 자면 도움 되지 않을까?”
“창문도 열고 잔다고! 창문도 안 열고 내가 덥다고 하는 바보야?”
“그러니...”
“아침에도 더워! 학교 가는 길도 더워!”
“...............”
그냥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안했다.
‘고약한 놈, 내가 아빠가 맞아? 이건 하인취급이지, 아....정말 싫다. 고3의 부모 노릇이.’
그렇게 처참해진 마음으로 밤 수업을 마친 아이를 자취방에 내려주고 돌아왔다.
그리고 애꿎은 아내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 그러면 그냥 들어주지 꼭 해결하려고 든다며 타박하지,
그렇다고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소리 안하면 성의 없다고 뭐라 하고.
뾰족한 방법도 없는 이야기에 난들 어떡하라고?
학교 때려치우라고 해? 남들도 참는다고 하면 남하고 비교한다고 그러고...
당신이 상대해줘 나 너무 힘들어!“
문득 아이의 친구들이 생각났다.
어쩌다 보게 되면 늘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친구 아빠인 내게 절대 무례하지도 않고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퍼붓지도 않는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내 아이도 분명 남에게는 그럴 거다.
그러고 보면 때론 남의 아이가 편하다.
좀 더 생각해보니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른들도 그런다.
가족이라고, 아내나 남편이라고 마구 쏟아놓는 험한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피곤하면 피곤한 기분 그대로, 답답하면 답답한 문제를 원망 가득한 채로,
남의 집 아이들은 언제나 예의 바르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밝게 대해준다.
때로는 남의 집 아이들이 편하다.
이웃집 아저씨도 그렇다. 윽박지르지도 않고 짜증난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무언가 도움이 필요해 부탁을 하면 잘 들어주거나 거절을 해도 상냥하게 한다.
이웃집 아줌마도 늘 표정이나 말투에 곱고 부드러움을 담는다.
말뿐만이 아니라 옷매무시도 예의를 차리고 함부로 억울한 불평을 쏟지 않는다.
때론 이웃집 아저씨나 아줌마가 훨씬 더 편하다.
그것은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뒤집어쓰는 무례함 투정 화풀이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마땅히 자기가 감수해야할 감정까지 떠넘기지 않기 때문이다.
예의와 배려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만 가능하다.
아무리 부부고 가족사이라도 찌르면 다치고 휘두르면 멍이 든다.
그 간단한 법칙을 무시하는 바람에 어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혼으로 헤어지고
상처 입은 기억으로 평생을 힘들게 풀어나가는지 모른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도 그렇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어라”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모든 슬픔과 고통, 부끄러움 죄를 다 쏟아놓을지라도 괜찮지만
끝없이 내 욕구를 채우라고 하인에게 시키듯 소원을 말하는 것은 무례하고 사납다.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지만 심한 냄새와 역겨운 모습을 당연히 들이밀고
치우려 애쓰지 않는 것도 남의 잡신을 믿는 신도만도 못한 태도가 맞다.
내가 이 민망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며 생각해보는 이유는
나의 아이를 남의 아이보다 나쁘다 못하다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이에게 남의 아빠보다 무심했던 것을 돌아보고 반성하려는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이웃집 아저씨만도 못하게 난폭하고 배려 없었던 것을 고치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론 남의 아이가 되고, 때로는 이웃집 아저씨가 되어야 겠다.
때론 더 좋은 이웃집 아줌마 정도는 되는 자세로 사랑하는 배우자를 대해야 겠다.
자기가 마땅히 감당해야할 짐도 가족에게 집어던지는 무뢰배는 되지 말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