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너는 죽을 걸 알면서도 왜 살아?
<그럼 너는 죽을 걸 알면서도 왜 살아?>
아내와 내가 지내는 병원에서 밉살스럽게 자꾸 부딪히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자기 위주로 하는 말이 그랬고, 하는 행동이 또 나와 너무 스타일이 달라서.
참 호감이 안가는 불편한 분.
어느 날 복도에서 휠체어 팔걸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을 보았지요.
제대로 못 서는 다리로 바르르 힘주며 일어나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곁을 지나가다 눈이 마주친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나 환자복 바지 좀 올려줄래요?”
화장실을 들어가 일을 보고 나왔는데 한쪽 다리도 한쪽 팔도 마비라
엉덩이에 걸려버린 환자복 바지가 허리로 올라가지 않아 싹씩 거리던 중이었나 봅니다.
차마 남에게 보여주기 부분의 민망한 살을 다 보이면서...
휠체어 뒤쪽에 서서 양 겨드랑이로 팔을 넣어 환자복 바지를 잡고 안아 올리면서
동시에 바지도 올렸지요. 건강한 사람에게는 무지 쉬운 상황은 간단히 끝났습니다.
그런데 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스쳤습니다. 딱하고 동시에 서글픈 복잡한 감정이.
‘이 분에게는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낑낑 매면서도 살아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가족들조차 때로는 무거운 짐으로 여기고, 세월가면서 조금씩 외면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다 그 사람을 향해 가졌던 밉쌀의 감정이 슬그머니 사라지면서 측은함이 몰려옵니다.
그때 갑자기 가슴 한쪽 구석에서 핀잔 섞인 말이 들려왔습니다.
‘사돈 남 말하네! 지도 그러고 살면서... ’
그랬나요? 그럼 누가 왜 사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요?
산에서 내려온 사람에게 친구가 물었습니다.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
그러자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너는 죽을 걸 알면서 왜 살아?”
먼저 말한 사람이 대답을 못합니다. 애초부터 쉽지 않은 질문이었지요. 둘 다.
사람들은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올 걸 알면서도 산을 올라가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온갖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며 살지요.
과연 왜 그러는 걸까요? 산은 내려오고 다 살면 죽는 끝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어떤 유명한 산악인은 ‘산이 거기 있어서!’라고 대답했다지요?
또 다른 철학자는 ‘이미 태어났으니!’라고 대답했답니다.
멋진 표현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정답은 아니지요.
산이 있어도 사진 배경으로만 사용하고 산을 안가는 사람도 숱하고
더러는 이미 태어났음에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답은 ‘산’에 있지 않고 ‘출생’에 있지 않다고 봐야지요.
아마, 산을 오르면서 누리는 즐거움이 있거나 필요가 있을 겁니다.
다 산 다음이 아니라 살면서 얻는 기쁨이나 살 책임이 있는지도 모르고요.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정답이 ‘결과’에 있지 않고 ‘과정’에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맞이하고 보내는 하루는 분명 인생 전체 중의 과정입니다.
말로는 이상하고 논리적이지 않지만...
인생 살고 난 끝의 결과보다 어쩌면 하루라는 오늘의 ‘과정’이 더 귀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지금’ 여기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산 넘고 물 건너 어디를 헤매어도 못 찾고,
지치고 실망하여 돌아온 집에서 마침내 파랑새를 발견하는 동화와 비슷한 거지요.
강 건너편 불빛에 혹하여 눈 팔고 여기를 소홀히 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자리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겨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며 살면 안 되겠지요.
그러는 동안 눈물 많이 흘리고 상처받아 신음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나봅니다.
무엇이 되라. 어디에 도착해라! 가 아니고,
어떻게 살아라, 내일 걱정말고 오늘만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라! 라고.
그래서 저도 준비합니다. 누가 ‘왜 사냐?’고 물으면...
남들은 몰라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여기라는 자리, 오늘 하루라는 순간이 너무 귀해서!”
그것도 고생거리가 사방을 포위하고,
맘에 드는 사람보다 밉살스러운 사람 더 많아도
행복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하루가 주어졌으니까 산다고 말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그 하루를 꼬박 앞에서 인도하고 곁에서 함께하며
등 뒤에서 지켜준다고 약속하는 하나님도 계시잖아요.
그러니 바지도 올리지 못하는 분도 열심히 투병하며 살고,
저도 지나가다가 조금 힘 보태며 사는 거지요.
삶이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혀도 아픈 아내를 간병하며 하루 또 사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