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은 유족이 된다.
<누구나 한 번은 유족이 된다>
“유족이라도 웃고 싶을 때가 있다고,
유족이라도 춤추러도 가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다고,
언제까지 유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야만 하는 거야?“
삼 남매 중 가장 어린 여동생이 큰 오빠에게 울먹이면서 말했다.
14년 전 7살일 때 부모님이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고아가 되어버린 후
어렵게 살아 온 서러움에 복받쳐서 하는 말.
공소시효 15년을 불과 3개월 앞두고 다시 경찰과 신문방송의 관심을 받으면서
불편해진 심기가 그렇게 터져 나왔다.
드라마 ‘유성의 인연’에 나오는 대사지만 가슴 한편이 아팠다.
세월호 사고로 가족을 잃고 ‘유족’이라는 명패를 달고 사는 분들이 생각나서...
막내딸아이는 사과를 입에도 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6살 때인가는 심지어 깎아놓은 사과 한쪽에 500원씩 준다고 꼬셔서
두 쪽인가를 억지로 먹여본 것이 마지막 이었던 기억이니.
아마도 근 20년 가까운 동안 다 합쳐도 사과 한 개? 두 개를 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를 ‘백설공주’라고 놀렸다. 친구 중에도 그러는 사람이 있었다.
“사과 먹으면 죽어? 어떻게 되는데?”
“그냥 싫어!”
별 이유가 없었다. 무슨 큰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알레르기도 없다.
그저 씹히는 느낌이 싫다는 이유 하나로.
단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가 지금까지 사과가 줄 수 있는 유익한 영양과
사과에 따르는 온갖 추억을 다 원천적으로 밀어내버린 것이다.
무섭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생동안 가져올 큰 결과가.
그러고 보면 무엇인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은총이던가!
그 대상이 먹는 것이든지, 사람이든지, 혹 책이나 영화, 여행이더라도.
그 좋아하는 이유가 사는 재미를 더해줄 것이고, 온갖 기쁨과 추억을 만들고
그것을 손에 넣거나 즐길 때 감사도 늘어날 테니,
어쩌면 그것은 행복으로 들어가는 자격이고 출입문 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은 대부분 하늘이 주시는 은총이다.
물론 나쁜 대상을 좋아하여 사람을 해치는 중독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온갖 투병을 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좋아하지 못할 때 오는 괴로움을 보면 그렇고,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 서로가 좋아지지 않아서 생기는 갈등을 볼 때도 실감한다.
노을 지는 저녁 같은 특정 시간대가 좋아지면 하루에 한 번씩 행복해질 것이다.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혹은 길이나 어느 장소도 그렇게 다가올 것이다.
생각만 하면 흐뭇해지고 보기만 해도 기뻐할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야 모든 것에 의욕도 생기고 사랑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생 중에 슬픈 일 괴로운 일을 수시로 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와 이별을 하고, 누구나 살면서 한 번은 유족이 된다.
좋아져야 인생이 행복해진다는 기준에서 보면 이럴 때가 위태롭다.
그런데 이미 일어난 고통, 유족의 딱지를 계속 달고서는 좋아지기가 힘들어 진다.
좋아하려면 슬픔도 잊어주어야 하고 고통도 흘려보내고 용서하고 극복해야만 한다.
좋아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삶을 산다는 것은 배터리가 없는 차를 밀고 걸어가는 것과 같다.
그 상황에 도움은 고사하고 ‘유족’이라는 이름을 올가미처럼 씌우는 사람들도 있다.
자꾸 제동을 걸면서 자기 잣대로 비난을 해서 더 깊은 구렁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 말도 안 되는 잔인한 일들이 이 땅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고,
어쩌면 그 주동자, 때론 고개 돌린 외면자로 개신교가 행동할 때는 끔찍함이 몰려온다.
슬프고 많이 답답하면서 드라마에서 나온 절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유족이라도 웃고 싶을 때가 있다고,
유족이라도 춤추러도 가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다고,
언제까지 유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야만 하는 거야?“
그들이 다시 그럴 수 있도록 남은 정리를 해주고 위로해주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서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회복하도록 해주어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꼭 유족만이 아니라 슬픈 일을 당해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래여하고
꼭 지금만이 아니라 과거의 일도 그렇고,
꼭 이 땅만이 아니라 바다건너의 약자에게도 그래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