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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웨스턴리벤지'로 떠는 수다

희망으로 2015. 5. 17. 20:12

<그저 영화 한 편을 보고 떠는 수다 - ‘웨스턴리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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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수용소 보다 열배는 위태로운 상황과 

백배는 비열한 인간성에 분노하고,

천배는 나도 별 수 없겠다는 비굴한 예상으로 비참해지는 영화.

그래서 흔하게 있는 서부영화 한편으로 해부를 당한 기분이 든다.

개인과 집단과 미래의 비관적 전망을 덤으로 얹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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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독하고 어느 멋진 배우가 연기를 보이고

작품성은 어떻고 영화 예술로의 서부극이 정통이니 퓨전이니

뭐 그런 건 전문가들이 무지 많고 널려 있으니 나는 생략한다.

그저 수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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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 영화의 시작. 성적본능의 지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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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오락 액션영화, 특히나 서부영화가 그렇듯 복수에 복수로 이어진다.

오랜만에 만난 남자 주인공의 아내가 함께 마차를 합승한 두 남자에게

성희롱 끝에 성폭행을 당하고 죽는다.  열 살 아들도 죽임을 당하고...

초반부터 전형적 폭력을 사용하며 보는 이를 긴장시키던 악당은 

강간하던 바지를 채 올리지도 못한 채 숲으로 뒤뚱거리며 도망가다가

추격해온 남자주인공으로부터 총 타작을 받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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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욕구. 성폭력 강간, 

참 질기고 질긴 많은 불행의 씨앗이다.   

그놈의 잠깐의 운동. 남자와 여자가 벌이는 몸 놀이가 

왜 이리 인간들을 끝없이 불행하게 할까? 

본래 신이 축복의 수단으로 인간에게 준 성적 본능이 한 일들을 보라.

멀리 다윗은 멀쩡한 장군 우리야를 죽였다. 밧세바와 정을 통한 뒷수습으로.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서 창녀놀이를 하다가 자식을 얻고.

미국 대통령도 호되게 된서리를 맞았다. IMF 총재도.

어디 손으로 꼽을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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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 중 3분의 1은 어쩌면 이 문제가 시발점인지도 모른다.

죽음 전쟁 죄악 타락 조작 파탄 상처 이별. 등의 숨은 원인이 되고, 

때로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당하는 폭력의 결과가 되기도 한다.

성경에서 음란과 정욕과 성적 헤프닝과 순결에 대한 이야기를 다 지워보라

얼마나 부피와 내용이 줄어들어 가벼워지는지를.

그만큼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멍에에 질긴 본능이고 

살아서는 분리가 안 되어 분리수거가 불가능한 쓰레기가 되게 한다.

죄와 영혼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망가뜨려 우리를 통째로 잡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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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 대리 운전도 아닌 대리 희생자를 뽑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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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그렇게 죽은 악당이 진짜 큰 악당의 동생이란다.

죄로 감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또 죄를 짓다가 황천길로 간 것이다.

졸지에 아내와 아들을 잃고 두 악당을 갈겨 죽여도 슬픔을 감당할 길 없는

남자주인공이 거꾸로 무리배의 그 두목에게 ‘죽일 놈’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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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잡아와! 두 시간 안에.”

“그건 불가능하지. 누가 그랬는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럼 마을 사람 중에 대신 죽을 2명을 내놓아! 만약 안 내놓으면 4명을 죽이겠어!

그놈들이 잡히는 날까지 날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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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시장이라는 작자도, 보안관이라는 작자도 굽실거리며 눈치만 본다.

무법시대에 마을 지키는 명목으로 매월 80달러를 상납하는 총잽이조폭이니.

결국 마을 주민 중에 2명을 희생양으로 선발한다.

나이가 많은 노파 한명과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 남자 한 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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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잘못 없어요! 간청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주세요!”

“내 인생은 보잘 것 없지 않아요! 나는 아직 죽기 싫어요! 누굴 해친 적도 없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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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장애인에게 여지없이 총은 발사되고 

‘악마의 영혼에게도 신의 자비를’ 외치는 노파에게도 총은 예외 없다.

그리고도... 또 한명의 건장한 사내가 더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원형으로 둘러싼 가운데서 지켜만 보던 전혀 이유 없는 사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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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은 너무 싸, 곧 죽을 노인과 다리도 없는 불구자로는 2명 목숨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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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계산이 분명한 악당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마을주민 중에서 가장 싼 목숨이라고 선정하고 내놓는 

건장한 이들에게 찌르는 신의 비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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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전체를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 위기에 내릴 수밖에 없는 합리적 결정일까?

사람목숨에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의 무게가 다를까? 

건장한 사람과 장애자, 능력 있는 사람과 재능 없는 사람도 다를까?

괴로운 선택에서 누구나 비슷해지는 비겁한 합리성.

한 발 더 나가서 목숨 값을 냉정하게 계산해 한 명 더 죽이는 악당.

모두 꼼짝도 않는다. 노파의 손자도, 보안관도 시장도, 마을 주민들도.

영화나 만화 속이라면 영웅 같은 주인공이 나서서 용감하게 해치우거나

혹은 딱딱 부러지는 경우에 맞는 말로 항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저 속에 있고 저 상황이 현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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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명 대신 우리는 한 지역을 통째로 그런 무뢰배들에게 내어준 적이 있다.

바로 내일이면 몇 주기가 되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당시에. 

어떤 이는 그 뒤로 아직도 계속해서.

또 독재의 억지와 폭력, 수탈에 대항하다 숱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우리는 안다.

뉴스로 간첩타진 사형집행 뭐 그런 소식을 접하면서도 슬그머니 외면하고 잊어주면서.

그거나 뭐가 다를까? 약자를 내어주고 죽어가게 냅두고 무기력한 채 살아남는 모습이. 

물론 가슴속으로 무진장 부르르 떨고 이를 악물고 신에게 심판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있던 주민들이나 그 역사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네나. 

그래봐야 무기력이고 비굴함이고 상처만 입고 뭐 그래서 문제지.

아니다! 세월호의 뒷 수습과정과 반응을 보면서 수동적 상처가 아니라 다른 모습도 본다.

능동적 비난과 피해자를 다시 더 심한 구렁으로 밀면서 자신들이 의로워지는 경우를...

역사는 발전을 한다. 더 악랄하고 지능적으로, 문제는 사람도 덩달아 발전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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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 - 한 마리 양으로 다른 양을 살린다?]


가진 물건들을 팔아서 마을을 떠나 먼 서부로 가려던 남자 주인공.

마을 단골집을 들러 헐값에 넘기고 떠나려는데 출동한 보안관에게 잡히고 만다.

큰악당의 보복을 두려워 한 주민이 신고를 하고 보안관은 법을 핑계로 체포한다.

쇠창살에 가둔 후 뎅그렁 울리는 예배시간에 교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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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례가 있어서 늦으니 죄수에게는 물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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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불구자를 제물로 악당에게 생명을 내어주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가는 신앙인. 무엇을 기도할까? 그것이 가능한 신과 신도와 종교는 살아있는 걸까?

하기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일본에 아부하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고도 교회는 살았다.

권력의 독재와 부정부패로 착취하는 정부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교회는 예배를 드렸지?

억울하게 죽어가는 약자들, 벼랑으로 몰린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비난하면서도 살아남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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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마리의 양을 주고 다른 양을 구하지. 나는 목동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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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족을 죽인 악당이라고 밝히는 남자주인공에게도 ‘자네가 안 되었지만...’하면서 그랬다.

시대가 바뀌고 무법지대에서 법치국가로 바뀌어도 변함없다.

더 큰 악당과 더 큰 힘 앞에서는 희생양을 고르고 내어주면서 그 뒤에 숨어 안주하는 인간성.

무엇인가 자신의 안녕을 첫째로 포함한 살길은 언제나 합리적이고 명분이 있다는 논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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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막 – 복수의 결과를 따라 옮겨가는 구차한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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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반드시 벌을 부른다?

많은 액션영화가 그렇고 서부영화는 더더욱 그렇다.

그 지겨운 상투적 공식과 과정이야 너무 많이 보아서 식상할 정도니 제외하고.

그 와중에 변신하는 목동의 논리가 참 인상적이다.

한 마리 양으로 다른 양들을 구한다고 하던 목동 보안관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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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께서 천신만고 끝에 당연한 결과로 악당들을 물리친다. 모두를 죽여서.

우리 모두에게 그런 힘을 신이 부여해주었다면 아마도 세상은 훨씬 나아질거다.

누가 함부로 남을 착취하고 괴롭히고 성폭행이나 강간을 실행할 것인가.

만약 그 영화의 엔딩이 날마다 이 골목 저 도시 곳곳에서 항상 일어난다면.

모두가 그 시원할 복수집행을 눈으로 대한다면 훨씬 마음을 고쳐먹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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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목동보안관께서도 뒤늦게 끝난 현장에 나타나 말미에 한마디 한다.

주인공의 신발을 벗겨서 거기 숨긴 돈을 가져간 시장도 죽었다.

알고 보면 큰 악당에게 마을 주민들의 집과 땅을 헐값에 사서 넘기는 파렴치범이었다.

물론 그 뒤에는 또 다국적기업이라는 싸움도 불가능한 더 큰 악이 있지만.

그건 영화로 다루기에는 무지막지한 상대라 아예 슬쩍 언급만하고 노터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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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챙이 부하들 모두가 총알받이 칼로 난도질 불에 타서 등등 죽었다.

한 때 협박과 인간성까지 메마르게하는 환경이었던 조폭집단같은 총잽이들이.

그리고 당연히 큰악당조차 총알을 몇 방이나 맞고 저승으로 갔다.

큰 위험과 주범이 사라진 곳에 무기력과 비굴함으로 생존을 구하던 자들이 활개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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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그들을 다 죽였군! 그럴 줄 알았어. 해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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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전에는 남자 주인공에게 그랬다.

‘자네가 참지, 가족을 잃어도 강도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었다면, 

노파도 장애인도 건장한 남자도 살아있었을텐데...’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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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희망이 생겼네. 누군가는 자네처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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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얼마나 자주 듣고 자주 보는 뻔뻔한 태도들인가?

이 땅의 역사에서도 구역질나도록 자주 보는 대사, 꼬라지들이 아니던가?

일본 패망 후 친일파들이, 6.25 전쟁 후 1차로 내빼던 도망자들이,

독재자가 총탄으로 사라진 후 멍들고 상처 입은 민주화인사들에게 해대던 꿀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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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우리를 구해냈네. 존, 자네가 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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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그를 잡아 큰 악당에게 넘겨주던 인사가 그 입으로 하는 다른 말.

만약 상황이 바뀌면 다시 다른 말이 나오고도 남을 그 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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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생각하면 더 끔찍하고 지겨워지는 사실 하나.

영웅은 언제나 고난을 이겨낸 한 명이고, 많은 이들은 비굴하게 옮겨가며 목숨을 부지하는 쪽이라는 것. 난들 별 수 없는 뻔한 배역...

그래서 이 영화의 끝은 참 더럽고 비참하고 열 받는다.

내 더러운 속을 해부당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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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 그래서 권유한다! 

모두 보시고 나같이 자신의 처지와 위치를 재확인하시라고 ㅠ.ㅠ... 

그래서 괴로우시라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