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는 고난과 상처받는 고난>
<선택하는 고난과 상처받는 고난>
총각 시절 서울 생존전쟁에서 지칠 무렵
외로움까지 몰려와서 힘들 때였다.
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늘 그런 외로운 사람들의 안식처다.
으레 청년들 모임에서 어제도 잊고 내일 근심도 잊고 지내곤 했다.
그러다 시간되어 다들 가고 혼자일 자취방이 가기 싫어 미적거렸다.
그렇게 보내는 주일 밤이 늘 고독했다.
어쩌다 행사라도 있어 좀 더 오래 친교를 나누다가
한 명 두 명 고단하다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겨질 때
그 순간. 웃고 어울릴 때는 가족 같다가 다른 처지임을 생생히 느낀다.
“먼저 갑니다!”
“안가세요?”
그렇게 자신들이 속한 또 다른 공동체 가정으로 편히 돌아가는데
나는 아무도 기다리는 식구가 없는 빈방의 서늘함만을 떠올려야 했다.
“아직 안 갔어요? 다들 가셨네.”
“예. 가야지요. 지금 가려고요.”
교회 소등하며 점검하는 사모님이나 사찰집사님의 멘트에 밀려 나온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사람들의 형편이 다름이 가져오는 무엇이 있다는 걸.
“아, 나는 같이 웃고 놀다가도 처지가 다른 사람이구나. 같지가 않았구나”
사람은 적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을까?
아니다. 적에게 얻어터질망정 상처는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배신의 쓰라림을 느낄 일은 없다.
배신과 상처는 늘 믿는 사람, 아군에게서 생기는 발등의 도끼다.
적에게는 경계를 하고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
세월호의 유족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위로도 하고 방문, 또는 동행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이 통곡도하고 때론 아스팔트 맨 바닥에 밤을 세우기도 한다.
정말 그들에게 위로도 되고 힘이 된다.
하지만 내 경험으론 조심해야할 일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한다고 다가온 사람들에게 상처받아
더 큰 절망과 외로움으로 또 추락하는 경우도 보았고
심하게는 바깥 악조건에는 버티던 사람이 무너져 세상을 떠나는 것도 보았다.
왜그럴까?
자신들을 괴롭히는 적도 아니고 위로와 도움을 주러 다가온 사람들에게?
이건 그 심정을 헤아리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같이 울어주고 같은 심정이 되어 대화도 나누고 해결하는 사이 마음이 열린다.
그러면 안쪽의 사람이 되고 무방비 상태로 깊이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어떤 순간, (시간이든지 조건이든지) 서로 다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작은 충격을 받는다. 겉으로는 결코 내색도 원망도 할 수 없는 경우로.
밤이 늦었다고 돌아가는 사람들, 몸이 힘들어서, 다른 약속이 있어서
여러 이유와 한계로 자기들만의 안전지대인 가정이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럴 때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알게 된다.
선택하는 고난의 사람들과 선택의 여지가 없이 고난에 빠진 사람들의 다름을.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적은 아니다. 나쁜 사람은 더더구나 아니다.
다만 그들이 미처 모르고 배려할 수 없는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름을 늘 인식하면서 위로와 도움을 받지 않으면
받는 사람도 더 큰 외로움에 빠지는 위험이 온다는 걸 말할 뿐이다.
‘하나인줄 알았는데, 언제까지 곁에 있어줄 줄 알았는데...’
언제까지, 같은 입장으로 있지 못하는 그들은 당연히 떠난다.
그들이 떠난 뒤 남은 이들은 자칫 버려지는 심정이 되어 심한 의욕상실을 느낀다.
다시는 적과도, 고난의 상황과도 싸울 힘도 없어지는 무력감, 외로움의 상태로.
언제인가 ‘내려놓음’이라는 유명선교사의 책을 보면서 그런 심정을 글로 썼다.
잘 나갈 수 있는 실력,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강, 가족, 재능을 다 가진 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듣게 되어 다 내려놓고 오지로 가서 고난을 견딘다는.
‘선택적 고난, 내려놓는 자랑스러움’
나는 그 책에서 그걸 여러 번 느꼈다.
그렇게 걷는 길에 하나님이 매사를 기적처럼 돌보며 따라오더라는 간증의 심정을.
나는 내 처지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표현했다.
‘내려몰림’
나는 선택도 아니었고 자랑스러운 심정도 아니며 원망과 슬픔만 가득한 채로
울고 불안에 떨면서 신앙의 길을 하루씩 가고 있다고. 솔직히.
비슷해 보이는 가난과 내일을 모르는 불안, 고난의 길을 가면서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도 정말 '내려놓음'을 을 하고 싶었다. 내려몰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게도 그런 형편과 복을 주시고 그런 기회를 주셨으면 싶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렇게 선택하여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도 있어야하고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으며 고난을 견디고 사는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둘은 입장이 다르다. 하늘과 땅만큼.
같은 장소에 같은 배고픔 추위 외로움을 당하면서도 너무 다른 무엇이 있다.
최악의 경우 돌아갈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선택의 여지없는 사람으로.
베트남 멸망 때도 그랬고 다른 지역의 분쟁이나 전쟁 때도 그랬다.
자국 선교사와 국민들은 빼내서 안전지대로 데려가는데
그 도움을 받으며 같이 지내던 수동적 사람들은 고스란히 그 위험에 있어야 했다.
사람들이 가진 한계를 돌아보면 서로가 이해하고 그 상황조차 수용할 수밖에 없다.
다만 서로가 그 끝이 오더라도 깊은 상처를 받지 않고, 무디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 다가가는 이들은 조심하고 남겨지는 이들은 이해를 준비하자는 것.
끝으로 꿈처럼 기대해보는 하나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선택의 여지없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오히려 다가온 이들을 외면하고
다가온 이들은 그들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한 경우다.
도움 받고 위로받던 자들은 비겁하고 염치없이 배신하며 목숨을 유지하는데
선택하여 고난의 자리로 간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까지 변치 않은 경우.
바로 예수와 그 제자들이다.
또 드물지만 성인으로 순교자로 불리는 이들이 그랬다.
우리네 보통사람들로는 꿈처럼 존경하고 따르고 싶지만 흉내도 힘든 경우다.
누군가의 어려운 자리로 다가가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닮아서 조심하고,
그 손길을 받는 사람들은 배신과 반역의 행동을 반면교사 삼아 그러지 말일이다.
(주로 도움 받는 입장이 되어버린 나는 자주 조심스럽다.
언제나 돌아서는 등을 예감하면서도 진심으로 감사해야겠다고...)
추신 : 제 글에 공감하시면서 한 달 쯤 전에 쓴 글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저는 모르고 쓴 글이었는데 목사님의 글을 읽고보니 저는 감상적인 개울물이고
목사님의 본문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같더군요.
여기 그 글을 덧붙입니다. 어쩌면 이 글에 제 글이 댓글로 붙어야 하는데...
<늘종 최태선목사님의 글 - 가난한자에게 전파된 복음>
인순이의 토크 드라마 "그대가 꽃"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가 방영되었습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그분의 이름을 다시 듣기만 해도 가슴이 저려옵니다. 저는 그것을 참된 복음의 삶이 가지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의 삶의 모습은 사람마다 그 모양이 제각각이어도 공통적인 것은 그 삶이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감동을 또 다시 맛보았습니다.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내렸던 아프리카 공항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더 열악한 곳에 사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내전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수단 남부 톤즈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만나고 싶어하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2010년 1월 14일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그는 톤즈 사람들을 걱정했습니다. 톤즈 사람들도 그런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방송 말미에 신부님이 톤즈 사람들에게 남긴 유언이 공개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내가 얻은 것이 더 많았다. 그들은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았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눌 줄 알았다.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줬다. 나를 사제로서 교육자로서 믿어주고 친구로 받아줬다. 톤즈의 친구들에게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신부님은 유언을 통해 자신이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런 종류의 말들을 허투루 듣습니다. 그저 상투어이거나 신부님이 워낙 훌륭한 분이어서 그렇게 느끼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분이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그 말에 담겨 있는 진정한 의미를 보지 못합니다.
방송에서도 그랬듯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과, 그들이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그 감동적인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그저 그토록 우수한 사람의 스스로 선택한 희생만을 봅니다. 우등생으로 의대 입학까지 했던 사람이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9살의 나이로 신학대에 가서 사제의 길을 걸었고, 톤즈로 가서 모든 걸 희생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위대한 인간에게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면만을 보는 것입니다. 이태섭 신부님뿐만 아니라 톤즈의 아이들, 톤즈의 사람들, 그리고 나환자들까지 모두가 주연이었다는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위대한 한 인물을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아무도 위대하지 않은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신부님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합니다. 그의 삶이 감동스러운 것은 그가 그들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시고 계시는데 인간은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운 것은 그것은 오직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 그곳에 계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나 혹은 그곳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시적인 성과만을 인정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근시안 때문입니다.
세상은 위대한 사람만을 부각시키는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위대한 사람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된 사람들을 부각시킵니다. 거기서 인간의 위대함은 사라지고 사랑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아무도 높거나 낮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공평한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왕이신 주님 외에는 아무도 더 높거나 더 낮은 사람이 없는 평등한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왕이신 주님도 사실은 세상적인 의미의 왕과는 반대로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며 희생하는 왕이십니다.
세상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이 사실을 이해하거나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도대체 그러면 그들이 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만을 되뇔 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지체의 비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방식으로 높고 낮음을 따지며 높은 곳에 오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리고 부리고 편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기복주의가 아니라면서도 가능하면 많은 것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타협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욕은 힘 있는 자들의 사치다. 힘없는 이들은 안중에도 없다. 왜? 그들의 삶이 이미 충분한 십자가와 고통을, 하느님마저 비울 만큼 허무의 체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의 과제는 생존과 창조다. 자신들에게 남겨진 최소한의 선물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이다. 보잘것없는 물질을 가지고 자기 실존의 무로부터 어떻게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것인가이다. 여기에 새 출산과 새 창조가 있다."- 성공회 매튜 폭스 신부 <원복> 225쪽.
톤즈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남겨진 최소한의 선물을 가지고 살아남았습니다. 보잘것없는 물질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간단히 톤즈 아이들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을 그 무엇의 예로 들고 싶습니다. 오랜 전쟁의 상황 속에서 톤즈의 아이들은 눈물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울지 않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태섭 신부님의 사랑의 반응으로 그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이태섭 신부님의 사랑과 희생과 똑같이 너무도 귀중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 고귀한 눈물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만 이태섭 신부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루어낸 창조적인 반응이며 그들이 결코 낭비해서는 안 되었던 생명의 일부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인생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사역이며 열매입니다. 새 출산과 새 창조라는 말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거지였던 나사로가 했던 가치 있는 일에 대한 묘사는 단 한 단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부분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왜 나사로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는지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나사로가 어리석어 세상에서 잘 살지 못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매튜 폭스 신부가 보았던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과제가 생존과 창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이 이미 충분한 십자가와 고통을, 하나님마저 비울만큼 허무의 체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바로 그 어려운 과업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이태섭 신부님은 톤즈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행동을 통해 너무도 많은 영적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물질적으로 준 것, 세상적인 의미에서 값어치 있는 것을 준 것은 분명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태섭 신부님의 사랑에 창조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들이 총을 잡지 않고 악기를 잡은 것만으로도 그들은 위대한 선택을 한 것이며 음악에 대해 문외한이던 그들이 브라스 밴드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떤 큰 교회 건물이나, 봉사활동이나, 희생이나, 복음 전파나, 선교사역보다도 더 위대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요 예배였던 것입니다. 이태섭 신부님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졌던 감동을 세상 사람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내가 얻은 것이 더 많았다."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기독교는 얼마나 달라질까요? 웅장한 건물을 지어놓고 그 안에서 싸움질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힘으로 송사를 일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허탈하실까요? 서로 옳다고 주장하며 갈라서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린 프로테스탄트들의 행태에 속수무책인 성령님의 사역은 얼마나 허무한가요? 지금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고 하신 주님의 복음이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