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207 - 찌질 해도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잡담 207 - 찌질 해도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아,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시간 다 지나가는데...”
짜증이 잔뜩 나서 죄 없는 아내에게 퍼부었다.
샤워실을 겸한 장애인 화장실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오래 걸리고 있다.
20분, 30분, 시간은 점점 가는데 영 안 나온다.
속은 부글거리고 슬슬 폭발 위험이 높아가고 있다.
“아....정말 못 참겠다!”
거의 한 시간을 문 앞에 휠체어를 탄 채로 기다리는 동안 속이 탔다.
결국 오전 재활치료시간이 날아가 버렸다.
씻고 큰일을 보고 하기에는 남은 시간으론 턱없게 되었다.
“에이 썅! 이게 뭐야? 오늘도 시작부터...”
종종 있는 재활병원 풍경이다.
환자들은 몸이 불편하여 씻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배변도 무지 시간 잡아먹는다.
“좀 그만 툴툴대지...”
“그럼 치료도 망쳤고 짜증나는데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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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못해 말리는 아내에게 또 욱 반항기 청소년처럼 말을 했다.
이게 내 일상이다. 날마다 달고 사는 불평 원망 짜증들.
사람들은 24시간을 병원에서 살며 8년을 버티는 나를 대단한 줄 안다.
사실 보호자용 보조침대는 좁아터지고 돌아눕지도 못 한다.
아침마다 등 어깨 팔다리가 뒤틀리고 쑤신다.
그것만일까? 병원비 걱정에 환자가 수시로 아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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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얼굴 가득 평온한 미소로 신심을 담고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그러면서 지내는 줄 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나는 십 분 마다 투덜거리고 한 시간마다 짜증이고 조석으로 비관적이다.
그래도 명색이 가장이고 신앙인이라 아이들과 남 앞에서는 표 안낸다.
대신 몽땅 아내에게 쏟아 붓는다. 종일토록!
그런데 살펴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더라.
자식들이 무더기로 죽어가도 ‘주신 분이 가져가시니..’ 라고 안했고,
재산이 바람 앞에 먼지처럼 날아가도 ‘더 주려고 오는 고난...’어쩌고 안했다.
사람들이 고생할 때마다 내세우는 성경의 욥 형님께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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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불평도 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태어나게 하셨대요?’ 라고.
온 몸의 피부병에 못 참고 피나도록 긁어대면서 원망 섞어서.
아! 그래서 내게는 무지 위로가 되었다.
사람이 눈물 나고 힘들면 그러기도 하는 것이 맞다.
또 다윗이 무슨 말들을 했는지도 나는 안다.
미운 놈 직싸게 패주고 자식들과 딸린 짐승까지 싹 쓸어달라고 했다.
또 자신의 출생을 비관하면서 이런 말도 했던가?
" 내가 범죄 속에서 출생하였음이여, 구더기요 벌레 같은 존재 인 나...“라고.
도망 다니다 힘들 때는 ‘나 잊었어요? 왜 빨리 안 도와주는 거요?’ 라고
기억력 안 좋거나 약속을 안 지키는 불량하나님처럼 따지기도 했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는 그렇게 찌질 대면서 원망하면서 살기도 하는 거다.
하지만 나는 그 분들 존경한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오래 참고 견디는 법을 배운다.
욥은 그렇게 ‘내 죄요!’하라는 거룩한(?) 친구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안 받아들였다.
교회들은 고난받는 사람만 보면 숨은 죄를 들먹이고 회개하란다. 어쩜 그리 비슷한지.
그리고도 마치 성인처럼 화평한 얼굴로 감사의 말만 앵무새처럼 하고 견디라지만
욥은 투덜거리며 신음을 지르며 감사도 하지 않으며 또 그 시기를 견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나를 붙잡는다.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는 마누라 손잡고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 아무래도 하나님이 없나벼, 같이 가세!’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
비록 버티고 원망하고 자신을 신세한탄하면서도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
하나님 없다는 마누라의 노선을 따라가지 않고 외로움도 감수하며 살았다는 것.
어쩌면 밥도 얻어먹고 자식도 또 낳을 수도 있는 데 말이다.
다윗도 그랬다.
그가 목숨이 아슬아슬한 온갖 순간들을 넘기면서 불평 원망 눈물 펑펑 흘리며
정말 본받을 모범신앙인의 모습이라고 강요하는 교회의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어보여도
끝까지 그 모든 찌질한 몸부림들을 오직 하나님만을 상대로 했다는 사실.
그 신앙고백이 정말 중요하다고 나는 배운다.
얻어맞으면서도 겉으론 웃을 것 같고, 간도 쓸개도 다 줄 것 같은 사랑의 화신처럼
성경책 옆구리 끼고 두 손 합장한 신자의 모습은 보여줄 자신은 없다.
집 기둥이 무너지고 작살나도 ‘이것이 하나님 뜻이라면...’할 그릇은 더더욱 아니다.
울고 뒹굴고 한숨 푹 꺼지도록 쉬고, 방방 씩씩 짜증과 분노로 날마다 살 거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찌질 하고 착하지 않아도 그저 다른 길로 눈 팔지는 않으련다.
밥 주고 살림 펴주고 뭘 준다고 하는 온갖 유혹으로 내 눈앞에 흔들어도.
때론 내가 범죄로 태어났던지, 구더기 같고 벌레 같다고 스스로 한심해보일지라도,
도대체 어디로 내빼버리신 거여? 왜 안 구해주는 거여? 못 믿을 마음 생겨도
그 원망 신음 투덜거림 다 하나님만을 상대로 찌질거릴 거다.
꽁꽁 숨어있을망정 분명 보고 있다는 철벽같은 확신으로 퍼부으면서 살 거라고 다짐한다.
오직 하나, 불쌍한 이가 있으니 내 아내다.
내 온갖 순간의 불평과 울상을 다 받아주느라 녹초가 될 아내.
무슨 죄가 있어서 내 반쪽이 되었을까? 딱해라...
그래도 하지도 못할 양상군자나 성인 껍데기는 버리고 살란다.
'기독교 윤리학의 세계적인 석학',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스텐리 하우어워스 교수.
정신병을 앓는 아내와 살면서 고통을 겪은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왜 이러냐고? 묻지 마라. 모른다”
그의 부인은 심한 조울증 환자였다.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겠다고 고집하고,
하나님의 신호를 기다리며 잠들기를 거부하고, 환시와 환청을 반복했다.
그런 아내를 보살펴야 했고,
동시에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아들을 아내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스텐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정신질환자 가족은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나는 아들과 함께 살아남으려 몸부림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이것이다.
만약 당신이 함께 사는 누군가가 정신질환에 걸렸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 번째 임무는 당신이 살아남는 일이다.
당신이 살아남지 못하면, 모두 다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살아남으려는 노력은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인생이 계속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고 싶다면
살아남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어떤 모양이나 스타일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신앙인이라고 모든 고난을 아는 것처럼, 감사하는 것처럼,
이길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도 난치병 중증환자인 아내를 7년 넘도록 간병하면서
경험할수록 같은 대답이 나오더라.
- 모르겠다.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나는 나의 삶을 내 힘껏 견디며 살아 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