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194 -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같소?'
<잡담 194 -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약 40년 조금 모자라는 1977년 11월호 한국연극에 희곡작품 하나가 발표되었다.
이강백씨의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라는 제목의 희곡.
다음해 세실마당에서 연극으로 발표되고 뮤지컬로도 공연되었다.
실재로 이 희곡은 장마철에 썼고, 좋은 날보다 힘든 날이 많은 인생에게 무엇인가 기쁨을 주어야겠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고 그래서 그는 우울한 현실에 터무니없는 환상이지만 꿈과 희망을 심어 보려고 했던 것이 작품의 의도이다. 작품도 며칠째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는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다.
사람들은 날씨에 따라 변할까?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그렇다.’
까뮈의 단편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도 살인의 이유가 어이없게도 햇빛이 너무 오래 뜨겁고 강했기 때문이었다고, 단지 동기는 그것뿐이라고 끝까지 말했다. 복잡한 사람의 내면이나 말하고 싶은 의미야 여러 가지라고 하더라도 이유가 된다는...
사람들은 추운 겨울보다 따뜻해지는 봄에 자살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은 공인된 통계다.
봄이면 견딜 수 없는 우울함에 빠지고 자살로 이어지지만 정작 그 바탕은 겨울에 쌓인다.
혹한과 고독과 비장함들이 뿌리처럼 온몸과 마음을 파고들어 이미 준비를 끝내는지도 모른다.
비슷한 것으로 천둥 번개치고 쏟아지는 폭우의 날은 잘 견디고 나서도 정작 맑은 날이 오면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겨우내 꽁꽁 얼고 단단해보이던 축대가 봄 해빙에 와르르 무너지는 이유와 별 다름 없다.
병원 창밖으로 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손톱만한 틈으로 푸른 하늘이 빼꼼 보이고,
나머지는 먹구름 천지다. 먹구름은 가깝고 푸르른 하늘빛은 멀리 있다. 마치 인생의 고난과 힘겨움은 어깨위에 있고 행복과 위로의 꿈은 저 멀리 존재하는 것처럼...
자연이 사람을 닮는 걸까? 사람이 자연을 닮아 가는 걸까...
총각시절 나는 절대로 날씨에 따라 변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도 각오하고 남들에게도 밝게 보이려 애쓰고 살았다. 지나치리만큼 긍정적이고 일부러 더 쾌활하게 지냈다.
그러나 늘 혼자만 있는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쓸쓸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필요가 없고,
봐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그저 날씨가 나를 파전마냥 뒤집었다 엎었다를 반복했다.
고작 날씨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었다.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덮을 때는 방법이 없다.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머리와 어깨를 내리누르는 그 구름들 사이에 작은 틈처럼 보이는 하늘을 보면서 안다. 그 위에 고요하고 밝은 햇빛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바람이 불고 한바탕 비라도 쏟아지고 나면 마침내 드러날 그 푸르른 하늘을 안다.
먹구름 위로 하늘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걷어지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는 것도 다를 게 없다.
항상 눈앞에 어른거리는 고난과 절망의 먹구름이 너무 가깝지만,
벗을 날이 올까? 날아오르는 자유가 오기는 할까? 희망이 멀게만 느껴져도
없는 것이 아님을 믿듯 보게 될 날도 온다는 것을...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그렇다’ 다.
좋은 날이 오면 또 따라서 변한다는 기대가 없다면 어찌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