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써두었던 글을 옮깁니다. 그저 제 개인적 견해일 뿐입니다.
저는 6년 전에 사랑하는 딸을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먼저 하늘나라에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부모이므로 이런 글을 쓸 자격(?)은 있지 않나 싶어 이 글을 씁니다.
요즘 우리 크리스천들의 장례식에 가보면 <천국환송예배>라는 이름을 많이 씁니다. 주로 고인의 시신을 장지(葬地)나 화장장으로 운구해 가는 발인(發靷) 첫 단계 의식을 일컫는데, 시신이 담긴 관을 앞에 두고서 예배 의식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른 바 그 천국환송예배에 참여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합니다. 예배 의식의 순서를 맡은 집례자, 유족, 조문객들의 말들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 놓여 있는 고인의 시신을 땅에 묻기 위해 운구해 가는 그것을 <환송식>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보내주는 의식, 떠나보내는 의식입니다.
예배 집례자가 “이제 우리의 사랑하는 OOO님을 떠나보냅니다. 사랑하는 OOO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이렇게 사랑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합니다. 상주나 조문객의 추도사도 “이제 당신을 떠나보냅니다. 잘 가세요. 나중에 다시 만나요”라는 인사입니다.
고인의 <시신>과 관련된 의식이 많고,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합니다. 시신을 관에 넣는 입관예배에다 장지로 운구를 시작하는 발인예배도 있고 매장지에 관을 넣는 하관예배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가족 혹은 신자들이 시신에 둘러서서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를 합니다.
고인의 시신을 담은 관의 운구가 시작되면 뒤따르는 유족들과 조문객들이 흐느껴 웁니다. 관이 운구되기 시작하면 모든 신자들이 뒤 따르며 이 찬송가를 부릅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지금 이별하지만 나중에 다시 만나자 이런 인사입니다.
관이 움직이면 어떤 유족들은 고인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고, 안 돼! 가지 마! 보낼 수 없어!”하고 절규합니다. 화장을 선택한 이들은 고인의 시신을 화구로 들여보내면서도 마지막 <이별>을 애닯아 하며 절규하기도 하고, 화장 후 유골분을 뿌리거나 묻으면서도 “잘 가세요”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이 글 서두에서 사랑하는 딸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라고 밝힌 이유는, 유족들의 그 슬픔과 비통함을 100%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따라서 그 슬픔의 마음 자체에 대해 뭐라 말씀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고인의 시신을 두고서 보이는 그런 태도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합당한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인, 불신자들에게서 그런 반응, 태도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고인의 시신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시신이 다 없으면 뼈 한 조각 머리카락 하나라도 중요합니다. 바다 사고로 죽은 고인의 시신을 찾지 못하면 고인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 누워있다 여깁니다. 고인의 시신이 곧 고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발인 의식, 하관식은 <마지막 인사>가 맞습니다. 이별식이 맞습니다. 그래서 심각합니다. 절차가 까다롭고 엄숙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3일장을 치른다면, 발인예배를 시작으로 하는 모든 장례 절차가 이루어지는 오늘을 기준으로 본다면, 사실상 그 사랑하는 고인과 우리의 이별은 3일 전에 일어난 <과거형> 사건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인의 숨이 멎는 것을 지켜보는 임종(臨終)하는 그 시각이 이별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발인(發靷) 의식에서 우리 앞에 놓인 고인의 시신은, 우리가 이별해야 하는 그 <사랑하는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거기 관 속에 누워있는 시신은, 다만 우리가 이별한 그 사랑하는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 머물렀던 빈 <집>일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우리 몸을 <우리의 천막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육신은 그냥 물질(흙)로 이루어진 껍데기, 주거지라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영혼입니다. 그게 진짜 우리입니다.
즉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마치 어떤 집에 살던 사람이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선 그 새 집을 <하늘의 영원한 집, 하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 육체의 집이 무너지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의 영원한 집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육체의 집에서 탄식하며 하늘의 몸을 입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2>
저희 딸이 이 땅에 있는 집을 훌쩍 떠나 하늘의 영원한 집으로 이사를 가버리자 아내와 장모님은 딸아이와 같이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 하셨기에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후 예전에 살았던 모리 아파트를 지나갈 때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되새기게 됩니다. 주인이 이사를 간 그 집은 더 이상 집주인과 상관없습니다. 옛 주인과 그 집 사이에 얽힌 추억은 있겠지만, 그 집 자체를 두고 옛 집주인이라 여기진 않습니다. 즉, 고인의 육신을 고인처럼 여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만약 저희 가족을 잘 아는 사람이 저희가 살던 옛 아파트에 와 보니 주인이 이사 가고 없는 것을 알고는, 저를 아는 또 다른 사람들을 죄다 불러다 그 아파트 현관 앞에 모아놓고는 “최간사 가족 송별식, 환송식”을 연다면, 그리고 그 안에 우리가 두고 온 가구나 싱크대, 침대 등을 고이고이 꺼내 불태우며 “최간사님, 이제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다시 만납시다”하고 슬피 운다면, 옆 동네에 가서 잘 살고 있는 제가 그 소식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겠습니까?
사실, 입관식, 발인식, 하관식 같은 의식은 우리의 전통적 유교 장례의식을 차용(借用)한 것이고, 또 비기독교인 유족들을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으며, 그런 예식을 기독교적 예배로 드리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자칫 비기독교인들에게 엉뚱한 기독교세계관을 보여주는 위험성은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엄밀히 하자면 발인예배는, 이별식이나 환송식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이미 며칠 전에 천국으로 떠난> 상황인 것입니다.
성경적인 가치관에 따른다면 영혼이 떠난 시신은 이제 <흙>일 뿐입니다. 흙에서 창조된 우리 육신이었으니 원재료인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로 장례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시신을 고인과 동일시하는 태도, 혹은 지나치게 고인의 시신을 중심으로 한 장례의식과 의미 부여는 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천국환송예배>라는 호칭에 의문을 품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그런 명칭을 굳이 안 써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며칠 전에 떠난 주인공을 염두에 둔다면 송별식, 환송식이 아니라 추모(追慕), 추도(追悼)식이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6년 전에 딸아이를 먼저 보낸 데 이어 지난달에는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떠나보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장례 의식을 아주 간단하게 치렀습니다. 딸아이의 경우는 발인예배 대신 <감사예배>로 드렸고, 어머니의 경우 비기독교인 유족들을 일부 배려하였지만, 장례식에서는 발인 직전에 어느 분의 기도만으로 의식을 대신했고, 기독교인 유족과 조문객들을 위해서는 고인 시신 없이 별도의 장소에서 추모 예배를 드렸습니다.
화장한 딸아이의 유해는 산 속에 묻고 그 위에 벚나무 한 그루를 심었으나 그 장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곳에 딸아이가 누워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딸아이의 유해를 묻은 그곳은 그저 동산의 일부일 뿐입니다.
내 가장 큰 관심사는 진짜 우리 딸아이가 가 있는 <주님의 품, 주님 나라>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의 영화로운 <부활>에 대해서도 수많은 이론과 논쟁이 있지만, 우리의 상식과 추측을 완전히 뛰어 넘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지금의 우리로서는 절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부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인이 평생 머물렀던 빈 집인 고인의 시신은, 매장이든 화장이든, 혹은 (아직 찾지 못한 세월호 피해자들처럼) 영구적인 실종이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공연한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물론, 고인이 평생 머물렀던 고인의 육신은, 고인을 상징하는 결정적인 대상이 될 수 있기에 마치 고인을 보내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고인의 시신 앞에서 이별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태도요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가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며, 우리의 가치관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시신은 절대로 고인이 아닙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진짜 주인공인 고인이 떠난 시신은, 그저 흙덩이일 뿐입니다. 그저 물질일 뿐입니다. 마치 10년 동안이나 저희 가족이 살았던, 그러나 6년 전에 훌훌 떠나버린 옛 아파트 집처럼 말입니다. 그곳이 재개발되어 흔적도 없이 부서지고 치워졌다 하여도 거기 살던 주인은 다른 데서 잘 살고 있습니다.
장례의식을 치르더라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또 유족과 조문객들에게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시켜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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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제가 여러분보다 먼저 주님 나라로 떠나거들랑, 저의 벗들께서는 제가 몇 십년 동안 머물며 잘 살았던 저의 껍데기 빈 집일랑 거적대기로 대충 둘둘 말아서 어디 묻어버리거나 태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제 빈 껍데기 주위에 둘러서서 아이고 아이고 눈물짓거나, 그거 앞에 두고 이별식, 송별식 그런 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은 우리 식구들에게 하는 부탁이기도 하지만, 공연히 쓸데없이 시신에다 무의미한 비싼 수의 입히고… 그런 거 제발 하지 마시길. 평소에 입던 옷이 제일 좋습니다. 관도 합판으로 대충 짜 주시기 바랍니다. (오필록 목사님이라면 30분이면 뚝딱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제발, 금방 불태워질 관에 돈 들이지 마시기를 정말 정말 간청합니다. 합판도 굳이 새 걸로 살 필요 없이, 어디서 쓰다가 주워다 놓은 중고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거 진심입니다.
제발 부탁인데, 제 장례식에선 비싼 국화꽃으로 영정 사진 둘러싸서 장식하고, 그 사진 앞에 꽃 바치고 그런 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 필요하다면 시신은 병원 영안실에 둘 수 있어도 그 장례식장에서 무슨 의식 치르지 말고, 곧장 시신을 처리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러 갈 때 꼭 필요한 일손 정도(서너 명이면 충분하겠지요?)만 모이셔서, 남의 이삿짐 옮기듯이 가볍게 옮겨 주시고, 공연히 주인공인 제가 이미 며칠 전에 떠난 빈집을 땅에 묻기 위한 의식 치르기 위해 에너지 시간 돈 들여서 먼 길 오가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별 의미 없는 제 육신의 장례식에 귀한 돈 들이지 마시기를 정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남은 식구들 위로하기 위한 마음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실제적인 방법, 길이 널려 있습니다. 다들 장례식장까지 와서 경황없는 유족들 눈도장 찍고 가는 대신, 가슴 따뜻한 편지 한 장이 훨씬 저희 식구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혹 제가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온라인으로 그놈 대학 가는 데 몇 푼 보태주신다면, 아이고, 위로 중에 제일 큰 위로가 되겠습니다. 그놈이 혹시 공부에 관심 없어서 대학 안 가고 일찌감치 직업전선으로 나섰거들랑 보태주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발인예배 그런 거 다 필요 없습니다. 혹 하나님 안 믿는 저희 친지들이 왜 그런 의식을 안 치르느냐 따지면, 고인의 간절한 유언이었다 하시고, 주인인 진짜 최용덕이가 이미 며칠 전에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그래서 주인이 이사를 간 이 빈집이 어떤 의미인지 짧게라도 설명을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영혼>에 대해, 그리고 이 땅이 아닌, 영원한 하늘나라로의 귀환, 이사를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게 해주시겠습니까?
저의 육신(주인이 이사 가고 남은 빈 집) 장례식은, 공연히 먹고 살기 바쁜 이들 먼 길 오라 가라 번거롭게 하지 말고, 안 그래도 숱한 경조사비 지출로 얇은 지갑들, 조의금 얼마나 해야 하나 고민하게 말고, 저의 직계 식구들과 극히 작은 숫자의 필요 인력(서너 명)만 모여서 <쥐도 새도 모르게> 치러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경비도 몇 푼 안 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인터넷이든 어디에든 <최용덕이, 먼저 가서 기다린다고 우리보다 앞서서 출발했습니다> 공고 하나 올려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잠시 왔다가 본향으로 돌아가는 나그네 인생, 진짜 우리는 지금의 이 껍데기, 육신 안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좀 망가지고 낡아지고 잘려나가도 상한 것은 우리의 육신이지 우리의 영혼이 아닙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껍데기 집은 점점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4:16). 우리 모두 곧 이 집을 떠날 것입니다.
자꾸만 우리 육신의 개념으로 보니 훗날 천국에서 재회가 아득해 보이지만, 그래서 지금의 이별이 너무 아쉽고 서운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지나온 우리 인생 수십 년이 순식간에 바람처럼 흘러간 것을 깨닫는 것처럼, 우리의 재회도 아주 잠깐 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말 마치 한 숨 자고 난 후의 일처럼 말입니다.
사람의 수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육신의 개념으로 보니 갓난아기의 죽음이나 저희 딸처럼 열여섯 꽃다운 나이의 이른 죽음이 너무 아깝고 속상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보면 100년이나 10년이나 1년이나, 모두가 다 그냥 <잠깐>일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복귀해서 살게 될 하나님나라의 그 영원한 시간에 비춘다면 말입니다.
어쩌면 그 나라에서는 1년, 10년, 40년, 100년, 천 년… 이런 개념 자체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8절에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하고 가르칩니다. 이 신비로운 수수께끼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풀 릴 것입니다. (요즘 상영 중인 영화 「인터 스텔라」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 개념에 대해 주목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도 말고, 마치 일어나선 안 될 일처럼 경악하거나 떨지도 말 일입니다. 성도들에게 죽음은 절대 재앙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 그런데 이것은 제 장례식에 대한 바람입니다. 저의 생모께선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버지와 또 다른 어머니께서 생존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언젠가는 제가 상주노릇을 해야겠지요. 제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제가 이렇게 할 순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친지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그분들을 배려해야 하니까요. 참 쉽지 않은 일,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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