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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더하기 25> 서평

희망으로 2014. 11. 7. 21:51

<‘사당동 더하기 25‘ - 읽으면서 다시 떠올리는 가난 (1)>


1.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디 책 따로 설교 따로이며, 이론 따로 실천 따로가 가능하단 말인가?

그건 다 자기는 살기 싫으면서 남들에겐 좋은 말로 인기나 얻으려는 반쯤은 사기꾼인 먹물쟁이들이 하는 수작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책의 첫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이 선언!


[<사당동 더하기 25>를 쓰면서 이 불가분의 실천의 주체는 ’연구자‘였다가 ’필자‘였다가 혹은 ’교수‘였다가 심지어 ’우리‘였다가 때로 ’아줌마‘였다가 심지어 ’우리‘였다가 또는 ’나‘가 되었다. 이들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럼!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마음에 든다. 아니, 진실이다.


2.

1장 - 두 세상을 오가다. (밑으로부터 사회학하기)


그랬다. 나는 밑에 사는 사람이었고 두 세상을 사는 중이었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철거민들이 밀려나서 사는 상계동 끝 마을에 살았었다. 사람들은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그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고, 다닥 붙은 개미굴 같은 판자촌 골목에서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놀았다. 나도 그곳에서 지독한 가난과 함께 독신으로 자취생활을 하면서 총각시절을 살았다. 


작은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김민기의 ‘친구’나 ‘작은 연못’을 통키타로 부르며 밥 굶기를 밥 먹듯 지내면서 박정희가 죽는 뉴스도 보고, 광주에서 폭도들이 나라를 작살내고 있다는 관제오보도 욕하며 보았다. 지금도 일베류들, 심지어 아직도 일부 보수적기독교인도 주장하는 조작뉴스를 주먹 쥐고 울면서 보았다. 담임목사님은 스스로 상계동은 갈릴리마을이며 망해서 왔다가 조금만 벌면 도시로 나가버리는 뜨내기 교회임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얼른 돈 벌어서 나가세요! 그러셨다.


책의 시작부분에서 헬쓰장을 하는 금선 할머니 손주 덕주씨 이야기나 사례로 나오는 구구한 사연들, 모두 익숙한 풍경들이다. 굳이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볼 필요도 없이 날마다 보고 만나는 생활을 이 조사기 86년보다 7년이나 전부터 상계동 철거민 마을에서 생활하던 중이었으니...


더 실감나는 분위기가 궁금하면 영화 ‘꼬방동네사람들’이나 ‘어둠속의 자식들’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로 산 허병섭목사님의 모습과 그 시대의 군상들이 어떻게 밑바닥에서 살고, 가난이 대를 이어지는지 말이 아니고 피부로 먼저 와 닿을 것이다. 영화관에서 꺽꺽 울며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서럽게 떠오른다.


1981년 봄이었던가? 비가 쏟아지는 날, 다니던 영어회화책 판매회사가 파산하고 단체 실업자가 되었다. 우루루 짜장면 하나 먹고,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 건지 종로의 다방에서 낄낄거리던 그 날, 돌아갈 가정이 있고 부모님들이 건재했던 다른 친구들은 널널하게 티비의 프로야구 원년 개막식을 신나게 보고 있었지만 나는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렸다. 다음날 출근 할 곳도 없고 며칠을 못 넘길 생활비 등 처량한 마음이 몰려왔다. “나도 언젠가 취직을 하면 니들처럼 웃으며 프로야구를 봐줄테다.”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그리고 “나는 평생 결혼을 안 하겠다. 이 꼴로 가족을 건사하기는 틀렸다.” 그러면서... 가난은 그렇게 대를 물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아가고 있었다. 당시 상계동 들어가는 버스가 215번, 15번 두 개였다.


라르슈 공동체의 설립자 장바니에 신부는 ‘두 세계 사이의 하느님나라’ 라는 책에서 정신박약아나 장애자들을 정상인 사람, 세상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하나님나라를 설명했다. 이 두 세계는 중간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 죄인들과 하나님을 화해시키고 회복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그들 스스로는 결코 가난도 절망도 벗어나지 못한다. 대를 물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기다린다. 이 조사로부터 시작한 선한 작용들이 두 세계를 이어주기를, 사람의 본성, 정상인들의 욕망을 기준으로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임을 알면서도...


3. 

2장 - 가난 두껍게 읽기


가난이라는 대상이 원래 두껍다. 얼핏 생각하면 하늘은 끝이 없고 오르고 또 올라도 닿지 않는다고 떠올린다. 그런데 아래로는 누구나 바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난은 분명 아래로 추락하는 방향이지만 끝이 없다. 빠지고 끝이려니 하면 더 아래가 있고 더 추락할 여지가 또 있다. 신기한 수렁이고 늪이다. 그래서 가난은 두껍기 그지없다. 그러니 두껍게 읽을 수밖에...


책 속에도 잠깐 예가 나온다. “흑인이면서 가난하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라는, 그렇게 가난 속에도 차원이 있고 등급이 있다. 세상은 재개발을 통해 부를 챙기는 계층이 있고, 재개발을 겪으며 구석으로 구석으로 밀려나가는 더 가난해지는 철거민 계층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또 다른 지대의 사람들이 있다. 책 속에서도 그곳 주민들은 묻는다. “저 아줌마는 누구인데 맨날 마을을 들락거리는거야?”라든가, “영세가 뭐예요?”라고 묻는 덕주씨의 세상이 있다. 


80년대 유행하는 단어들이 있었다. 야학, 노동운동, 철거민투쟁, 운동권대학생 등,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사람들’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도 바깥으로 탈출하려고 심지어 더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고 등치고 억압하는 계층도 나온다. 머리가 좀 돌아가거나 힘이 좀 센 깡패들과 악질 부동산 괸계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지겨워 배신하고 몸까지 팔아가며 벗어나려다 불행해지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공할까? 그러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더 큰 외로움이나 보복, 타락으로 인한 좌절감들이었다. 아님 인간성을 완전 상실하게 되는 파멸이고...


연구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만나고 기록하는 긴 이야기들, 과정, 자료들이 2장 - ‘가난 두껍게 읽기’에 나온다. 발을 중산층이나 안전한 지역에 두고 어설픈 착한 마음만 가지고 기웃거리다 된서리를 맞는 상황도 있고, 마음을 몰라주는 얄팍한 눈앞의 이익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서 다시 가난의 굴레로 떨어지는 사례들도 나온다. 사당동이고 상계동이고 미국 흑인슬럼가이고 남미 어디고 다 있고 반복되는 가난의 본질이다. 스스로는 벗어나기가 참 힘든 두께와 약한 인간의 본성, 특히나 불안에 오래 찌든 가난한 사람들의 상태란 그렇게 되기가 더 쉽다.


그럼에도 이 살핌과 기록과 이해로 다가가는 자료들이 중간 완충지대를 만든다. 극과 극, 양극화 시대를 풀어 나갈 아주 작은 희망의 싹이 거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오늘 지금 당장 굶지 않게 가능한 방법으로 나누고 먹이는 일을 하기도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더 정답일까? 


4.

3장 - 산동네 달동네 별동네 ___


80년대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꼬방동네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술주정에 폭력적인 아버지 남편들이 나오고, 한 집 건너 장애를 가지거나 질병에 걸린 가족이 있다. 왜 더 저축하지 않고 더 열심히 일하지 않냐고 하는 사람들의 지적을 하는데도 거리가 먼 행태들이 무수하다. 


한 가지 물어보자. 비가 와서 돈벌이를 공친 날품팔이 가장의 지독한 괴로움에 어느 사람이 도움이 되는지를, 한 사람은 그를 불러서 밀가루 부침개에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한 사람은 기술교육을 시켜주고 노동법을 가르치며 멀리 세상을 바꾸는 준비를 하라는 경우, 이 두 가지는 경쟁적인 선택의 대상이 분명 아니다. 사람이 가난을 뿌리치는데는 두 가지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부분 눈앞의 괴로움에 몰락한다. 술을 마시고 분노를 주먹으로 가족에게 풀고... 


오랜 가난은 그렇게 사람을 습관화시키고 절망에 익숙하게 한다. 3장 ‘산동에 달동네 별동네’는 그렇게 시작된다. 첫 페이지의 그림일기처럼. 그들의 눈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희망의 대상이었고 손에 잡힐 것 같은 꿈이었다. 대학교수나 높은 공무원, 큰 회사의 사장은 아예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다. 하루를 살아야 미래가 있는 법이니, 하루에는 하루가 필요한 양식을, 미래는 미래가 필요로 하는 꿈이 있어야 하는 법이 정답이다.


가난을 어떤 수단으로 삼았던 정치인들 학자들 운동권들은, 정작 가난해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가난한 동지들을 배신한 사람들보다 더 해로운 경우가 많았다. 역사적으로나 시대적으로도. 반대로 멀리 정당한 꿈과 목적지를 가지고도 오늘 지금을 같이 살았던 이들도 안다. 천국을 말하면서도 참새보다 깃들 곳 없고 여우보다 굴도 없이 풍잔노숙을 함께하던 예수. 투쟁과 목숨을 건 생활을 함께하면서도 멀리 내다보던 체게바라. 배운 것을 신앙과 봉사라는 결단으로 살기 위해 늘 그들 곁에 머물렀던 많은 성직자와 단체들이 있었다. 


그렇게 지금과 미래가 하나의 사람, 하나의 삶에서 작동하지 않는 많은 이론들, 집단들은 늘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허무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이 책의 연구와 기록들이 그렇게 함께하는 일, 진정으로 ‘넘나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며 3장을 읽었다. 본격적인 사당동 이야기, 무수히 많은 각가지 사연들을... 


주거, 생계, 일상, 질병, 이별, 죽음... 처절하면서도 햇빛처럼 눈부시고,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불행 속에 발악하듯 탈출을 꿈꾸는 모든 철거민지역의 살림살이 모습이 나온다. 그냥 생명이 버티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가장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가장 필요로 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


소설이 더 진할까 르포가 더 진할까? 적어도 달동네에서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것이 삶이다. 아무도 소설을 그렇게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슬프고 슬프고 또 슬프고, 라거나 무겁고 무겁고 또 무겁고... 그런 소설을 쓰는 작가는 밥 굶어 죽기 때문에 안 쓴다. 이곳 사당동의 삶의 진짜 기록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그만큼 깊고 갖가지 사연들이 지독하고 지겹고 지루하게 펼쳐진다. 날마다.


(이 책 3장 사당동 사람들, 인생의 조건에서 나온 사례들의 소제목만 보아도 삶이 엿보인다.)   


o 해방촌 손녀 : “맨날 똑같아요” (149쪽)

oo 건설십장 – 파출부부부: 끝내 이혼 (155쪽)

ooo 시계노점상 아줌마집 : “아이들이 딱 정상에 올라서면” (160쪽)

oooo 묵장사 아줌마집 : 여성가구주와 딸들 (163쪽)

ooooo 일용잡부 – 과자 리어카상:“싸움도 가난 때문” (165쪽)

oooooo 미장원집: “아들 유학 보냈어요” (170쪽)



<‘사당동 더하기 25‘ - 읽으면서 다시 떠올리는 가난 (2)>


5.

4장 - 세상의 가난 가난의 세상


o금선 할머니: “밤낮 지지고 볶고” - 그렇게 한 할머니의 삶 안에는 한 나라의 긴 역사가 다 담겨 있었다. 전쟁의 역사, 경제사정과 도시계획으로 밀려다닌 과정도, 색시장사로 밥 먹고 산 생존의 우선순위 앞에서 욕하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까지. 때로는 사람이 역사 속에서 한 조각이 되어 떠밀려 다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하나의 조각인 금선할머니 생애 안에는 거꾸로 세상이 하나의 조각이었다. 역사와, 법의 무지와 횡포, 혈육을 책임지는 고단함까지 모두 들어 있었다. 그 한 몸뚱아리 안에 모두가...

oo수일아저씨: “여자가 없어서...” - 배운 것도 없고 든든한 부모의 재산도 없는 상태에서 노동에서 노동으로, 삶은 그렇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가난한 집, 가난한 가족들이 대를 이어서 살게 되는 반복처럼. 첫 여자에게 3명의 아이를 낳고 헤어지고, 두 번째 여자는 돈 주고 사온 국제결혼에 도망가고, 형편 안되는 상태에서 얻은 세 번 째 여자는 병들어 죽고, 그러니 그 수일씨의 3자녀는 또 대를 이어서 가난의 터널을 이어야 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몸이 성한 사람이 멋진 아디다스 운동화 신고, 몸이 불편한 사람이 절룩이며 같은 출발선에서 같은 100미터를 달리게 하는 것이 공평한 세상이 아니라고. 날 때부터 여유 있는 가정에서 좋은 교육과 넉넉한 성장을 하고 힘 있는 인맥 속에서 세상을 출발하는 경우와 도망 다니듯 굶고 못 배우고 가족을 책임지는 짐을 등에 진 열악한 상태에서 세상으로 나서는 경우 엄청난 불평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건 개인의 재능이나 성품이 무기력해지는 엄청난 차별이자 악한 조건들이라고...


가난이 왜 대를 물리는지, 어떻게 해야 개인의 재능과 성품과 노력이 정당한 결과를 만들면서 가난을 탈출할 수 있는지 넓고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애꿎은 사람만 잡기 십상이다. 게으르다. 약하다. 머리가 안 좋다. 별 이유로 비난을 하면서. 그러나 악순환의 당연한 법칙을 모르면서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모든 비난은 비난을 하는 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함을 종종 분노와 함께 느낀다. 차라리 자기에게 주어진 풍족함에 빠져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말고 혼자나 누리며 살다 가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ooo영주: “꿈은 많았어요” - 금선할머니도 신학교를 다니고 전도사를 하다가 말았고, 영주씨도 신학교를 다녔다. 비록 무허가였지만, 그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와 하나님이라는 신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결론은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다. 애써 노력하고 어느 무허가 신학교는 가난과 벽에 막힌 사람들에게 신앙보다는 의지나 피난처가 되어주면서 일정 수입을 올리고...


사람들은 신앙의 힘으로 가난을 견디고 노력하는 모습에 ‘하나님의 뜻’을 덮어주며 격려하곤 한다. 적어도 최악의 망가짐과 극단적 절망은 덜어주었을지 몰라도 결국 영주씨는 전도사의 꿈을 접었다. 함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어마어마한 능력도 같이 날아갔다. 아무 깨달음도 삶의 변화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oooo 은주: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 정말 잡초처럼 닥치는대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장사를 바꾸어가며 산 은주씨의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귀중한 사실이 있었다. 좀 길지만 옮긴다.



[복지 전공의 연구 조교는 은주씨와 상담도 하고 약 6개월간 일상을 지켜본 뒤 의견을 보내 왔다. 중산층의 사회복지 전공자의 시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의견서였다.


“은주씨는 통제력이 거의 없고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친해지자 술 사달라고 졸랐는데 같이 외출해보니 돈 씀씀이가 헤프고 중산층 시각에서는 이해가 안된다. 아파트 관리비가 6개월 밀려서 거의 쫓겨날 상황이어서 (교수님이) 한달 분 관리비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때도 자기 돈 있다고 옷 사입고 월드컵 스티커 사서 얼굴에 붙이고 정신이 없는 사람처럼 길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 (중략) 은주씨는 돈이 주머니에 있으면 내일을 생각하기 보다는 우선 쓰고 보자는 생각으로 돈을 쓰는 것 같다. 계획성 있게 생각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별로 갖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일하게 되어 한 달 수입이 100만원 가까이 되고 남편이 180만원 가까이 주고 수급자라서 한 달에 80만 원씩 받고 모두 합하면 중산층보다 낫다.”


이 조교는 1년반 정도 지난 뒤에야 은주씨네가 중산층보다 수입이 많다던 불평을 거둬들였다. 우선 무엇보다도 수입이 불안정하고 곗돈으로 부은 돈은 모두 미리 타서 썼고 빚 위에 빚을 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복지 전공 조교가 ‘가난한 사람들’의 염치없음을 말할 때마다 조금 더 지켜보라고 말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더니 1년반쯤 지난 후에야 감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불안한 수입구조가 염치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드는 객관적인 하나의 이유고, 그 심정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습관, 또 언제 쪼달릴지 모르고, 그러니 있을 때 심적인 궁핍함을 벗어나려는 본능에 가까운 반복들이 그렇게 만든다는 사실을 불안정 해보지 않은 중산층들은 도무지 모른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는 비밀이다. 서글픈 쳇바퀴...


불량배는 타고 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덕주씨였다. 그리고 모두 그랬다. 나염을 잘하는 기술자인 은주씨의 남편도, 수일씨의 중국인 아내도 더 많은 돈을 따라 흘러가버렸다. 영주씨의 필리핀 아내도 가난이라는 깊고 넓은 수렁에서 혼자 힘으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쳇바퀴에 허덕였다. 가난한 임대아파트의 이웃들도 비슷했다.


세상에는 부유함도 있고 가난함도 있지만, 가난에는 가난한 세상만이 되풀이 되고 있다. 세상속의 가난이 아니고 가난속의 세상이 맞다.


‘바람을 그리다’ 가난의 앞날 – 은주씨네 세 아이들, 영주씨네 아이들은 또 다른 가난의 앞날이었다. 대를 이어가는 가난이 가져오는 불안한 상태가 그대로 영향을 끼쳤고 내다보이는 안타까움이었다.




6.

5장 – 가난이 낳은 가난


가난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이다.

책의 초고를 끝내고 정리하는 동안 걸려온 전화로 다시 이러지는 기록이 생겼다.

마치 가난의 속성을 상징으로 보여주려는 운명의 장난처럼...



[초고를 끝내려는 순간 조교의 전화를 받았다. 은주씨가 성동경찰서에 있다고 도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중략- 빚진 이자가 부담되다가 대포통장 사기에 말려든 은주씨네 상황이었다) 난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가진 것이라고는 ‘맨몸’뿐인 사람들을 25년간 지켜보고 있음을 절감했다. ‘맨몸’을 팔 뿐만 아니라 돈이 되면 자기의 주민 등록 번호도 팔아야 하는 사회에서 살아 가는 사람들에 대해 그토록 오래 ‘연구’한 것이다]



맨몸으로 산다는 것 – 종잣돈이 없으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을 말하기도 한다. 도박 로또 등 우연한 일확천금이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한 종잣돈 마련은 괴로운 고문 그 자체다.


일수 .외상.계에서 카드깡.대포차. ‘러시앤캐시’로... - 가난한 사람들이 또 다른 목돈을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되돌이에서 무사히 몸을 건지는 경우는 정말 희박하다. 올가미도 이런 올가미가 없고 추락의 미끄럼틀이 되기가 일쑤다. 알면서도 모르면서도 걸려드는 현대판 올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바다위 표류자들이 알면서 마시며 죽어가는 소금물과 같다.


맨몸의 사람들이 기대는 또 다른 합법적 의지 교회, 가족, 생명보험 - 금선할머니와 영주씨는 꼬박 십일조를 내고 계도 교회모임위주로 했다. 상계동에서 사당동으로 교회를 계속 나가는 것도 하나의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말 그 역할을 다 해줄 수 있을까? 지금의 개신교는 불안하다. 또 하나의 대책은 가족들이다. 그러나 그 피난처이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한책임의 관계가 종종 불행을 부르는 고삐가 되기도 한다. 모두 무너지고 동반 자살을 부르기도 하고 파탄으로 몰고 가는 지름길.




7.

빈곤문화의 조건 (303쪽)


이 장은 따로 한 챕터는 아니지만 정말 중요하고 깊이 생각해볼 내용이 많아서 따로 쓴다.

만약 시간이 없거나 긴 글을 못 읽는다면 이 부분만이라도 꼭 정독해보시기를 권한다. 

읽기에는 그리 긴 지면이 아니지만(12쪽 분량) 다 옮겨 쓰기에는 긴 내용이다.

오스카 루이스의 <산체스네 아이들>에서 나온 ‘빈곤문화’를 저자는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라고 불렀다.



[이 연구를 정리하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에 주목하게 되었다. 빈곤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며 가난을 설명하는 데 가난 그 자체만큼 설명력을 가진 변수는 없다.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다.] (304쪽)



그리고 지금은 점점 가나의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저자는 염려한다. ‘세계화 된 가난’ 또는 ‘가난의 전 지구적 확산’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가난한 사람드르이 일자리와 임금은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 노동의 영향을 받았고 결혼 상대를 찾는 일마저 세계화의 영역안에 있다. 고 말한다. 그만큼 풀기가 더 복잡해지는 가난의 문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금융자본주의 시대는 더욱 개별화되고 제도화 된 가난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가난한 가족들의 생활양식은 모두 가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가난의 결과라고 본 저자의 말대로 라면 이 세계화 금융 자본주의, 도시공간의 자본주의적 재편 같은 구조적 요인은 실로 심각한 충경을 가져올 요인이 되어간다고 보았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