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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틴루터'를 보면서 개신교를 염려한다.

희망으로 2014. 11. 4. 08:59

 

 

<영화, '마틴루터'를 보면서 개신교를 염려 한다>

 

1 - 지옥이라도 기꺼이 가겠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모든 죄는 징벌을 받고 죽은 후에도 지옥에 보내져 영원히 고통을 받게 한다?‘

 

그런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만을 평생 달고 사는 것은 사탄의 바라는 것들이다. 마치 주인이 무서워 한 달란트를 땅속에 고이 숨겼다가 원금을 돌려준 사람으로 만든다, 그랬다가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된서리를 맞게 한다.

 

사탄은 늘 우리에게 그런 사기를 친다. 그것도 교회의 이름으로, 소위 목회자의 설교, 신앙의 고상한 무엇쯤으로 포장을 하고...

 

마틴루터는 이렇게 설교했다.

 

만약 고통 속에 버티다 저지른 잘못으로 지옥에 간다고 하면, 기꺼이 가겠다고 하라. 주님은 고통의 자리에 계시니 주님과 함께 거하겠다!”라고.

 

마틴루터는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했다.

 

생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목을 매어 자살한 아들을 앞에 놓고도, 중세기의 죄인 기준 때문에 비난받으며 슬퍼할 수도 없는 부모를 위로했다. 그리곤 교회의 마당에 직접 땅을 파고 매장해주면서 주님께 그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올렸다.

 

지금도 개신교가 고통은 외면하고 그 고통으로 온 자살만 죄악시한다. 넉넉한 상태만이 복의 증거고 불행은 불신의 결과로 연결하는 고약한 짓을 종종 한다.

 

2. - 주님은 정말 어디에 계실까?

 

넉넉한 환경속에서 삶을 누리며 죄와 고통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살 수 있는 사람들의 곁에만 계신 걸까? 가난과 천한 신분의 세습으로 멍에를 지고 살아가며, 수시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죄의 한가운데를 걸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무르지 않으시는 걸까?

 

주님이 계신 곳은? 주님이 머무르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인들 무섭고 두려울까? 그곳은 징벌과 벼락만이 난무하지 않고 따뜻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리라. 그곳이 고통과 슬픔, 죄의 한가운데일지라도..

 

3. - 면죄부에 대한 유감

 

마틴루터가 말했다.

 

"교황이 지옥(연옥)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다면, 왜 돈이 아니고 사랑으로는 안 되는가!"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발행해서 파는 것에 대한 비판과 가난한 이들은 살 수 없어서 영구적인 죄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외친 질문.

 

마틴루터는 강의 중에 로마를 가본 적 있는 사람 손을 들라고 했다.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그에게 면죄부를 샀냐고 물었다. 그는 사지 않았다고 했다.

 

"저는 면죄부를 하나 샀지요. 할아버지를 연옥(지옥)에서 건져내었지요. 두 장 샀더라면 할머니도 건져낼 수 있었는데 돈이 없었지요

 

사람들은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것이 무엇을 담은 말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어서 말했다.

 

"심지어 성인들의 성물을 보기만 해도 죄가 사해지고 연옥에서 몇 년씩 줄어들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또 웃었다. 프리드리히 작센 전하를 모시는 친구 서기는 루터에게 비난을 멈추어 줄 것을 말했다. 계속해서 유임을 시켜주는 제안을 곁들이면서,

 

루터는 유료 입장료를 받으면서 성인과 성물들을 보여주고, 그 행위가 죄를 덜어준다는 궤변을 지적했다. 친구 서기는 먹이(월급)를 주는 사람의 손은 물지 말아야 한다면서, 고해와 성사도 헌금을 받고 하니 그것과 비슷한 일 아니냐는 변명을 한다.

 

루터는 친구 서기에게 '자기의 자리와 목숨이 전하의 손에 달렸나?' 라고 둘러서 협박은 옳지 않음을 말한다.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직시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권력, 그것이 교황과 주교일지라도 면죄부나 건물을 짓기 위한 궤변들은 옳지 않음을 지적한다.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서 피하는 정도도 못 되는 개신교의 일부는 권력에 아예 줄을 대고 특혜를 받으며, 댓가로 지지를 하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변함없는 욕심과 권력의 결탁.

 

4. - 요한 테첼 신부의 면죄부 강매

 

그는 광장에서 불을 피우고 손을 불에 대고 지글거리며 익히는 모습을 군중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손바닥만이 아니라 온 몸이 하루 이틀, 일 년 십년도 아닌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지옥을 가기 싫으면 면죄부를 사라고 한다.

 

성경까지 인용하면서 베드로성당을 짖는 일에 돌을 나르고 힘을 보태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영락없는 약장사 수준의 교묘하고 두렵게 만드는 수사법으로. 그러면서 장작에 불을 부치고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그림을 그 불 위에 편다. 이 정도 되면 선한 양심과 두려움이 혼합되어 가진 것을 다 내놓으면서 면죄부를 사게 된다.

 

5. - 현대판 면죄부 강매...

 

지금이라고 다를까? 성전건축을 위한 목적으로 헌금을 강조하면서 내세우는 것은 부끄러운 신앙생활 운운, 또는 복을 받지 못 할 거라는 두려운 협박 등이 너무도 닮았다.

 

대형화 교회건물을 짓고, 세상권력과 협력적 유대 속에서 힘을 추구하는 것이나, 시간이던 재물이던 훨씬 불리한 사람들이 죄를 더 지을 수밖에 없는 생활을 하게 되는 논리도 그렇다.

 

심지어 병이 들거나 가난한 상태로 사는 것을 믿음이 부족해서 하늘에서 버림받은 결과로 몰아세우는 타락한 설교의 논조도 한 몫 한다. 아이러니하다. 그 잘못을 지적하면서 출발한 개신교가 다시 중세기 카톨릭을 닮아간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