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으로 읽는 ‘죽음과 종교‘ (6) - 제1부6장, ‘영원한 생명, 죽음 이후의 문제’>
기독교에서 천국을 빼면 말이 안 된다. 부활을 믿는지 여부가 기독교와 비기독교인을 구분하는 중요 기준인데, 천국이 없다면 부활한 영혼들이 어디에서 머무를까? 그냥 남의 집 처마아래나 하늘에 둥둥?
그만큼 중요하고 당연한 대상인 천국은 부활이 없으면 국민 없는 국가와 같이 될 것이다. 부활은 죽음이 그 앞에 있지 않다면 일어날 수 없고, 또 죽음은 삶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으니 기독교 삶과 천국은 한 줄의 이쪽과 저쪽인 셈이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말했다. ‘죽음을 인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결국 모든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산다는 것)
‘첫째는 죽음을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생의 마지막으로 보는 점에서 허무주의나 쾌락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중간생략) ‘두 번째는 죽음 뒤에 오는 영생의 부활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죽음 이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죽음을 단절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107p)
그 변화의 중심에 ‘죽음-> 부활‘ 과정이 있고, 그것을 가능케 하며 보장하는 것이 예수와의 결합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여기까지는 신자라면 누구나 쉽게 동의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자가 될 리가 없을테니. 복잡한 것은 이런 문제다.
‘죽음은 우리가 쌓아 왔던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립니다. 우리의 소유에 치명타를 입히며, 우리가 그동안 맺었던 모든 관계들도 무(無)로 돌려 놓습니다.’ (108p)
이렇게 시간적 생명이 끝나면 그 다음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고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시적 생명이 끝나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의 충만한 실현이 있다고 믿습니다.’ (108p)
그러면 살아서 하는 모든 소원과 모든 일들, 모든 만남과 관계들이 정말 무의미한 헛일일까?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고 죽음 이후에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삶과 그런 생명을 하나님은 왜 만드셨을까? 재미로?
여기서 또 다른 부활을 제시한다. 죽음 이후가 아닌 살아서 변화하는 영혼의 부활. 시간의 일직선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삶에서 바로 일어나는 부활, 영혼의 거듭남을 말하는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영혼의 부활을 체험합니다. 이때 주어지는 영원한 삶은 역사의 마지막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109p)
그러면 앞에 말했던 ‘죽음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린다’는 정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현재 시간에 삶속으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은 무엇이고 죽음이 무로 돌려버리는 모든 것은 또 무엇일까?
하나는 육체를 말하고 하나는 영혼이라고 쉽게 답해버릴 일은 아니다. 육체의 삶에 아무 영향도 상관도 없는 영혼이 어디 있고(그건 무당이 말하는 귀신일 뿐) 영혼에 상처든 기쁨이든 주지 않는 육체, 삶이 과연 가능한가?
저자는 영생과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런 대답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과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 합리적인 논증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중략) 부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합리적 설명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의 자세를 통해서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110p) 라고...
맞는 말이기는 하다. 2천년이나 온갖 신학이 나와도 여전히 안 믿는 사람도 있고, 온갖 명설교도 삶으로 증거한 모습을 보고 믿는 신앙의 힘에 턱없이 모자라는 것을 보면, 그러면 그냥 살아보면 될 것을 죽음에 대하여 미리 교육하고 준비하자는 이 시도는 또 무엇때문일까?
내가 존경하는 본회퍼목사의 이야기가 내게는 살아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영생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그 힘은 하늘에서 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확신을 하루아침에 길에서 줍듯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쓴 ‘자유를 향한 도상’ 내용을 읽고 또 읽고 생활 속에서 순간마다 새기면서 위로 받으면서 점점 느꼈다. 자유(다음 세상인 천국)이 주는 확신이 지금 이 삶에 어떤 용기와 길잡이가 되는지를.
그리고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무로 돌린다는 말에도 동감한다. 비록 본회퍼목사가 그의 영적확신으로 이 세상의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였지만 그건 거기까지 밖에 모른다. 살아 있는 이 세상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가 그의 믿음대로 자유의 세상에서 기쁘게 웃고 잇는지, 혹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후회를 하는지는 각자의 믿음 속에서만 존재 가능하기에.
결론 – 이 책의 1부, ‘죽음과 인생’의 결론은 이렇다.
‘역사의 종말에 맛보게 될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 영혼의 거듭남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120p)
내가 1부를 읽고 난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기를 주시고 하신 말씀,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 축복의 명령대로 열심히 살 일이다. 살면서 감당해야할 많은 고통과 두려움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선택한 결과다(아담의 첫 선택이 유전되었던, 날마다 내리는 우리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이던지)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선택을 바르게, 지혜롭게, 치열하게 할 것을 압박하는 존재로 늘 우리 등짝에 올라타고 머무른다. 살아 있는 동안에 힘으로 작용하고, 쌓여가는 영원한 자유에 대한 확신은 죽음의 공포와 허무함을 최대한 상대적으로 줄여갈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이 사라짐에도 살아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이고 해방이고 선물이 될 것이다.
오늘 하루의 삶이 죽음이 어떤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던지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 오직 오늘도 내일도 갈 길을 가겠다던 예수의 발걸음을 뒤따르는 삶이 가장 첫 번째 할 일일 뿐이다. 그렇게 살고 나서 다음은 우리의 범위 밖이니 오직 처분을 맡길 뿐이다.
- ‘죽음과 종교’ 제 1부 ‘죽음과 인생’ 읽으며 묵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