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으로 읽는 ‘죽음과 종교‘ (4) - 제1부4장, ‘죽음의 시각으로 삶을 보면서’>
<묵상으로 읽는 ‘죽음과 종교‘ (4) - 제1부4장, ‘죽음의 시각으로 삶을 보면서’>
4장으로 들어와서 그간 1,2,3장을 읽어 나오며 생기던 질문에 답이 될 만한 것들을 보았다. 예를 들면 죽음이 그렇게 자체적으로 아름답고 축복의 존재라면 왜 빨리 죽지 않는가? 왜 교회들이 신자들에게 빨리 죽으라고 권하지 않는가? 같은 것.
죽음이 주연인가 삶이 주연인가,
그러고 보니 눈에 안 들어왔던 표지의 부제목이 이제야 보였다. ‘삶을 새롭게 하는 죽음 생각’ 이라는 부제목. 아하, 그랬구나. 이 책은 결국 삶을 더 소중하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죽음을 동원하고 관찰하고, 심지어 죽음의 공포를 이용했구나. 하는 것을.
그러면서 ‘모든 인생의 문제는 자살의 문제로 귀결 된다‘ 고 한 까뮈와 사람은 죽지 못해 사는 찌질한 존재라며 ’자살예찬론‘을 쓴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또 ’인간의 곤경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삶에 대한 공포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한 아브라함 헤셀의 이야기도 인용한다.
그럼에도 죽음이 더 유익하지만 고단한 삶을 버티고 살았던 바울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그 이유는 오직 남을 위해 유익함을 줄 수 있다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했다. 죽음이 축복이라면서 왜 죽지 않고 삶을 사는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의 삶에 큰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우리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삶에서 얻지 못했던 큰 축복을 안겨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선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물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 (53p)
죽음이 축복이라면서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최고의 선물이다?
하지만 좀 애매하게 들리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죽기 이전부터 나의 삶의 한복판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54p)
그러면 굳이 삶과 죽음의 구분이 왜 필요하고 또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 표현은 뭔 말인가? ‘죽음은 최고의 선물이 아니라 최후의 선물입니다’ 라는 소제목 아래 말하는 내용 말이다.
‘그 선물과 축복은 시간의 순서에 있어서 마지막에 오는 것입니다.’ (55p) 심지어 ‘그 선물을 미리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신앙적이지도 않고...’(55p) 라고 까지 말했다.
좀 전에는 지금 삶의 자리에도 누려야하고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가장 큰 선물이라는 말했는데 그 두 주장은 서로 충돌이 온다.
아주 특별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이 안 그런 사람에게도 똑같이 공감될까?
또 한 가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은 모리교수의 투병이야기(61p-65p)나 이영호교수의 투병이야기(67p)를 통한 죽음을 대하는 모습은 특별한 경험을 거친 특별한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살면서 바울이나 위 두 사람의 결심을 따라서 하게 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가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 혼란스러운 것은 저자도 말하는 두 가지 태도다.
‘죽음의 필연성에 대한 깨달음은 현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죽음의 필연성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67p)
‘오히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명령합니다.’(67p)
그런데 뒷부분에 가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삶의 허무함을 경험합니다’ 라면서, ‘사실 인간이 죽음에서 마주치는 공포는 단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가 아닙니다. (생략) 죽음 가운데 인간이 마주치는 공포는 죄와 심판의 공포, 즉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입니다.’ (69p)
나중에 말한 공포감과 불확실성으로 오는 두려움이 보통 사람들이 더 느끼는 솔직한 상태일 것이다. 물론 ‘믿음으로 잘!’이라거나, 그러니 삶을 언제나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잘!’ 하면 된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신앙적으로는 반발을 할 수 없는 명답이 된다. 공포와 허무를 하나님을 의지하면 순간의 삶을 사랑하게 된다. 변한다. 뭐 그런 만병통치의 선언.
그러나 이런 연결은 좋은 답이 아니다. 다음 장에서 다루어 질 거라 생각해본다. 그렇게 다른 두 개의 상황을 무리한 신앙의지로 싸잡아(중간을 생략하고) 연결하지 않는 교육을 해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