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를 남에게 설명할 정도인 아내가 그렇습니다.
아내는 내가 꺼낸 '인도'라는 단어를 듣던 공인현선교사님께 그렇게 나를 소개했습니다.
맞습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아내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슬리퍼를 끌고 마을 산책을 나갔다가 좀 더 멀리 가고 싶어질지 모른다.
그 다음에는 공항으로 가고 싶어지고 그 길로 인도 어딘가로 가서 살지도,
누군가를 만나 또 결혼을 할지도 모르고, 아니면 자원봉사자로 살지도..."
그렇게 떠나고 싶고 하고 싶은 삶을 탄식했더니 아내는 그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내용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과, 그 꿈과, 그 외로움까지를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덜 외롭습니다.
앞 말의 단어 하나만 말해도 뒤에 나올 말과 바닥에 있는 심중을 알아주는
고마운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이 참 위로가 됩니다.
멀리 일산까지 검사와 진료를 위해 아침일찍부터 서둘렀습니다.
잠도 모자라게 설치고 나섰지만 고속도로는 정체로 발목을 잡았습니다.
예정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어지게 생겼고,
잘못하면 오전밖에 안하는 진료예약을 펑크내게 생겼습니다.
예전 독일에서 프랑스 떼제공동체로 가는 아우토반에서 시속180킬로를 달렸지요.
그 후 처음으로 시속 140킬로를 달렸습니다.
한국에서는 120킬로를 넘기지 않고 운전한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결국 늦었지만 다행히 진료는 보았습니다.
검사결과는 듣지 못하고 나중에 통보를 받기로했습니다.
멀리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시는 공인현목사님이 병원까지 오셨습니다.
한달 가까이 전에 미리 서로 약속을 했었지만 막상 만나기로 한 당일에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냥 죄송하다고 말하고 취소를 할까? 어째야 하나...'
아내의 몸 상태, 특히 실명한 오른쪽 눈의 통증이 몇 달이 되도록 나아지지 않습니다.
많이 힘들어하고 외출도, 만남도 힘들어할 것 같아 망설여졌습니다.
나도 덩달아 괴롭고 침체되어 자동적으로 타의적으로 침묵피정이 되었습니다.
정말 심연으로 가라앉아 사라져버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누구에게도 무거운 표정, 무거운 말 한마디도 보이고 싶지않아서...
"내가 억지로라도 왔을겁니다!"
취소할까 고민했다고 솔직하게 말한 내게 목사님은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고맙게도,
뒤돌아보니 무지 가라앉고 있는 나를 건져주려고 한달가까이나 전에 하나님이 깔아놓은 복선이었습니다. 당일이면 거절할게 뻔한 내 성격을 감안한 예정.
하나님의 배려와 도우심이 늘 감격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찬양을 들으며 운전을 하는데 눈물이 핑 돕니다.
내게는 그렇게 무거운 삶의 원인이 되고 있지만,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알고 있고, 한마디만 하면 나머지를 채우고도 남을
아내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또 필요할 때마다, 적시에, 적당한 역할로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분들이 있고,
그 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이 배경에 계신다는 경험이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