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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으로 읽는 '죽음과 종교' (1) - 제1부 1장 '죽음 생각은 삶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희망으로 2014. 10. 9. 08:57

<묵상으로 읽는 죽음과 종교‘ (1) - 1부 제1-‘죽음 생각은 삶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타이타닉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주로 고고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아름답게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선장과 배의 설계자, 노백작 부부, 노래를 불러 아이를 재우는 엄마, 음악을 끝까지 연주하는 악사들.

 

그리고는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외면하고 잊어버린 척하며 기저귀문화로 산다고 지적’(14p)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말도, 생각도 금기가 되어가며 교육을 통한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을 우려한다. 1장의 끝으로 다시 죽음교육은 삶을 축복의 자리로 인도’(17p)하며, ‘인생길을 멋지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18p)는 말로 끝맺는다.

 

맞는 말이다. 죽음은 이미 예정된 것이며 단 한사람도 예외가 없는, 세상의 여러 법칙 중 가장 공평한 기회다. 어찌 보면 태어날 때 이미 동의하고 서명한 약속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에도 계속 짊어지거나 안고 가는 동반자 중의 한명이다. 그리고 죽음을 잘 이해하는 길은 곧 삶을 오해나 과용으로 허투루 쓰지 않게 해주는 좋은 울타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 그러나,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미화한 해석은 불편하다.

 

그럼에도 어떤 해석이나 주장은 지나치다. 죽음을 너무 미화한다는 이질감 같은 무엇을, 그 중의 하나는 죽음 자체가 곧 삶을 축복으로 인도하는 주체라는 뉘앙스는 불편하게 한다. 분명 죽음은 삶을 알차게, 실수하지 않게 도와준다. 그러나 비록 영향력을 주기는 하지만 삶의 주체는 아니다. 죽기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타이타닉의 아름답게 죽어간 사람들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아무 부담감도 없고, 충분히 살 길이 있는데도 차분하게 아름답게 그 길을 선택했다면 그건 자살이지 결코 미담은 아니다. 누군가의 기회를 가로챈다는 부담감, 혹은 책임감으로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리에서 그동안 쌓은 연륜과 지성과 양심, 혹은 종교적 훈련을 통한 도움으로 그 상황을 평온히 받아들인 것뿐이다.

 

죽음은 여전히 모든 사람에겐 최상의 길도 아니고, 자발적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기쁘게 맞이할 순간이 아니고 두려움과 아픔과 후회의 대상이다. 오죽하면 피할 수만 있다면 제게서 이 잔을 물려주소서!’라고 예수도 기도했을까. 그런데 마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더 기뻐하고 몰입하는 태도를 기저귀에서 못 벗어나는 삶으로 표현하거나 단정하는 것은 분명 지나치다.

 

 

죽음은 고통스런 문을 지나가야하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수도하는 사람들 중에 죽음을 간절히 바라며 수련하는 사람들이 있나? 천국을 자랑하고 믿으며 살기를 설교하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을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이 아플 때 곁에 가서 바라던 천국을 빨리 가시기를 빈다고 하면 정말 기뻐할까? 죽음 자체가 그토록 복의 주체라면 왜 모든 종교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아있기를 바라며 에덴동산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죽음이라는 유한의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의 바람이 아니었고 사람들의 범죄로 인한 벌이며 추락이었다.

 

죽음이 그렇게 복된 자리로 인도하는 좋은 것이라면 사람들은 왜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잊은 척 하며 살아갈까? 사실 죽음은 산 사람들이 살아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대상이고, 죽은 이후는 모르는 세상이다. 그렇게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서 왜 많은 이들이 두려워할까? 죽음이후 심판으로 지옥에서 고통 받을지 몰라서 그런다고 말하지만 그건 머리로 설명하는 생각이지 본능적으로, 솔직하게 느끼는 첫 번째 이유는 아니다.

 

그보다 더 가깝게 공감하는 것은 이것일지 모른다. 죽음은 고통의 문을 지나야하는 절차다. 생명이 죽음으로 바뀌는 그 순간에 대한 공포가 더 솔직한 대답이다. 질병의 방법이나 사고의 과정이나, 혹은 노화, 무엇이든지 그 지나야하는 자체의 고통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것이다.

 

또 하나는 죽음은 지금 확실하고, 지금 누리는 것들로부터 헤어짐이다. 보내는 쪽이나 떠나는 쪽이나 이별의 슬픔이 상상이 되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죽음이 기쁨과 아름다움을 가져오는 실체거나 주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자기 자신도 죽고 남을 죽여주는 것도 선행을 베푸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고통을 말하자면 살아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주 경험한다. 큰 사고나, 어떤 경우는 선택해서 당하기도 하고, 남에 의해서 원치 않는데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니 반드시 죽음을 맞을 경우에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살았지만 죽는 것보다 힘든 고통을 종종 겪는다.

 

또 이별이나 상실의 경험도 그렇다. 이혼, 실연, 버려짐 등 많은 헤어짐이 살아서도 겪는 일들이다. 오히려 오지 않은 일들에 대한 상상이 두려움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 더 솔직한 진단일 수 있다. 사실 죽음이후에 생길 일에 대한 상상은 무의미한데도 말이다. 죽음이후는 관여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진실을 알 수도 없는 세상이다.

 

 

어둡고 슬픈 자리에서 솔직하게 인정하며 출발해야 한다.

 

죽음이 삶을 축복으로 이끈다거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까지 미화하면서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는 대부분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 내키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 지나친 논리를 실행으로 옮긴 사례가 사이비 종교의 집단 자살 같은 경우다. 그걸 바른 선택이라고 보지 않는 게 세상의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삶을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은 오직 죽음만이 하는 건 아니다. 인생길을 멋지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도 아님을 또 분명히 해야 한다. 삶을 복되게 해주는 숱하게 많은 방법과 간접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공부, 봉사, 자기실현, 나눔, 예술적 생산, 구도의 훈련 길, 등등 중의 하나.

 

삶이 편안하고 건강해서 무지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은 죽음교육을 해도 끼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리고 오래 가지 못하고 쉬 잊어버린다. 또 정작 죽음의 문턱까지 몰려서 버거워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온갖 말들이나 이론은 별 힘이 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당사자는 니가 죽어가봐라, 그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속으로 그렇게 서운한 생각이 저절로 든다.

 

아주 가깝게 공감하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음직전까지 가면서 죽음을 체험하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생하게 기억하며 그 말을 할 자격도 있고 들을 자격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데 사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삶에 가져오는 의미를 이미 삶에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공감은 아니다. 이미 변화할 것은 변화를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교육은 죽음에 대한 추상적인 미화가 아니라 어둡고 차가운 대상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전제하고 해야 한다. 심지어 이론이나 종교적 교훈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책장을 덮거나 설교가 끝나면 사라지는 공허한 죽은 교육이 되어 더 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손을 한 번 더 잡아주는 것이 더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자신도 가보지 않은 삶의 저쪽, 죽음의 세계 문 안에 선 사람처럼 여기가 아름답다고, 어서 힘내서 오라고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의 세상, 이쪽에 같이 서서 두려움과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여 두려워하는 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죽음은 힘든 대상이다. 어떻게 그 것을 짐작하게 만드는 고통 이별, 상실의 짐을 지고, 안고, 저기 끝에까지 잘 살아갈 것인가를 솔직하게 대화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