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160 - 저는 나중 받을 고통을 미리 받는 중이니라?
<잡담 160 – 저는 나중 받을 고통을 미리 받는 중이니라?>
“어떻게 아픈 거야?”
“어느 때는 바늘로 콕콕 찌르고, 그러다 찌른 채로 그대로 있는 것처럼 계속 아프기도 하고, 어느 때는 욱신욱신 머리통 전부가 얼얼하고...“
망막동맥폐쇄로 실명된 안구가 자꾸 수축되는 과정에서 오는 압력 때문인지 아내는 날마다 눈의 통증으로 씨름 중이다. 한 판 업어치우기로 물리치든지, 일찍 항복! 하고 넘어가든지 둘 중 하나가 되지도 못하고...
대학병원 안과의 선택 진료 교수님 두 분이 다 속수무책이라는 진단을 내린 마당에 뭘 더해야할지 모르겠다. ‘어쩌냐?...’와 ‘안약 넣어줄게’만 차례로 반복하며 덩달아 나도 지겨운 고문을 당하며 버틸 뿐이다.
- 저는 이미 받을 복을 다 받은 사람들이다.
부자에 대한 성경속의 상식이 그랬다. 그래서 어지간한 믿음의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되고 장수하고 자녀들이 많아지는 복을 다 받는 걸로 기록되었다. 고난의 대표적 모델이었던 욥도 예전보다 더 많은 복을 받는 것으로 끝났고, 고생 고생 죽을 고생을 하던 요셉도 성공해서 끝이 나고 솔로몬도 그랬고. 적어도 구약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한 때 폭삭 망했던 욥에게 친구들이 지독히 끈질기게 네가 무슨 숨긴 죄가 있으니 몰수를 당한 거라고 몰아댔다. 그들이 별난 게 아니라 구약의 대부분 사람들이 가진 상식이었다. 그래서 부자가 못되거나 아픈 것은 곧바로 죄인이거나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당연히 내려졌다.
가난하고 질병을 가진 사람, 곧 죄인이라는 공식으로 보면 우리 부부, 우리 가정은 죄인이다. 그리고 버림받았다. 구약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현대판 교회에서도 대부분의 신앙인에게조차 바닥에는 그런 흐름이 깔려 있다. 그걸 대낮에 성전에서 공공연히 설교시간에 주장해대는 목회자들도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천지가 진동을 하게 되었다. 그 공식적인 신앙관을 깨는 사람이 나타났다. 부자는 천국 가는 거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 부자청년에게 다 팔고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 저는 하늘에 재물을 쌓아서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며.
부자가 못되고 건강하지 못하면 죄인이고 저주받은 사람으로 주눅 들어 살던 이들에겐 그야말로 8.15 광복절 같은 해방선언이고 자유를 선언하는 기쁜 소식이다. 글자 그대로 복음!
부자가 되고서도 변치 않고 잘 살기는 너무 힘들다며 재물과 하나님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돈 있는 곳에 마음도 간다고 했다. 또 병으로 신음하는 자들이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잘라서 말해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편도 들어주셨다.
...그러나, 그럼 뭐하냐고, 이 지독한 질병의 고통과, 그로 인한 가정의 해체, 살림살이의 폭락은 어쩌라고, 날마다 시시각각 찰거머리처럼 몸에 붙어서 괴롭히는 통증을 가진 아내나 그걸 보면서 간접 고문을 당하는 나는 무슨 낙으로 이 날을 견디라고.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고, 가난하고 아픈 우리는 신음하며 돌아눕는다. 과연 절망의 벽에 몰아넣는 게 예수님의 목적이었을까?
재물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고 그의 미래와 생활의 전부를 쏟아 붓는 대상이 되고 만다. 어떤 경우 하나님과 상관없이도 살게 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끊어주고 싶었을 거다. 진정한 영생을 주고 싶고, 탐욕이 걷어져야 다가올 자유, 참 행복, 평안 등을 주고 싶어서 재물의 복을 스스로 거두고 미루라고,
건강을 가져가고 그 자리를 질병의 고통으로 채운 것이 의도? 허락? 으로 생긴 것이라면, 그랬다면 아마 그런 비슷한 이유였을 거다. 내 몸이 내가 원하는 욕심을 이루어주는 도구 이상으로 중요하고, 심지어 연약함을 투병을 통하여 생명의 주인도 따로 있다는 깨달음을 얻으라고.
저는 나중 받을 고통을 지금 받는 중이니라.
그럼, 나중에는 복을 먼저 다 누린 사람들보다는 벌을 덜 받을까? 다음에는 상이 더 많고, 기쁨이 더 많을까? 정말 그렇다면 죽는 날이 다가옴을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으로 하루씩 손꼽을 수 있을텐데, 정말 그런 것 인가요? 정말...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가 하나 있다. 그렇게 바랐다면, 그렇게 선포를 하셨다면 왜 이 땅의 모든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어 버리지 않고, 모두가 질병의 고통을 당하게 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나 몇 몇에게만 그렇게 허락을 하시는 걸까? 우리 죄라는 원인으로 온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 = 곧 재물 장수 성공 건강을 받는 복!> 이라는 선포를 성전에서 계속 주장하고 주장하는 걸 허용하실까?
그건 모르겠다. 접어놓고, 분명한 한 가지는 원하는 만큼 부자가 되지 못하고 자주 부족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근심하고 돌아간 청년처럼 되지 않도록 넌지시 도와주심을! 또 여기 저기 몸의 연약함으로 고생하는 분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덕분에 우리의 낮은 한계와 다른 멀쩡한 건강으로 인하여 감사하게 되니, 기왕 등 떠밀어주는 김에 자발적으로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이 신앙인의 복이 아닐까?
아내를 데리고 안경점을 들렀다. 수축되어 보기 흉해지는 한쪽 눈을 가려주기 위해 색이 진하게 들어간 안경을 맞추어 주었다. 남들이 볼 때 얼른 눈에 보이지 않도록만 해주어도 아내의 위축과 민망함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아서. 이 비용도 누가 주고 가는 바람에 이루어졌다. 바닥난 우물에 물을 채워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