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가는 길/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

내 안의 조각들 - '하나 되게 해주소서!'

희망으로 2014. 1. 16. 10:49

 

<내 안의 조각들 하나 되게 해주소서!’>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1]

 

사람들이 재미삼아 하는 혈액형에 대한 분류가 있다.

그중에 내가 가진 AB형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천재 아니면 바보또는 그 극과 극을 왔다 갔다 하는 미치광이 기질을 가진 사이코,

나는 스스로를 지독한 변덕쟁이라고 자주 인정한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나보다 아내인 엄마를 더 무서워한다.

십년을 넘어 이십년에 이르는 호통쟁이인 나는 종이호랑이다.

아이들이 자라고 덩치가 커질수록 그마저도 더 작아지는 종이호랑이...

늘 큰소리치고 화를 내지만 일관성이 모자라고 변덕스러워서 그렇게 몰락했다.

같은 닐에도 어느 때는 불같이 법전을 펴놓고 따지다가

어느 날은 같은 일에도 복권 맞아 입 벌어진 아버지처럼 관대하고 너그러워서 그렇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쯤이었다.

날마다 학교에서 친구가 주었다면서 장난감 먹을 거 때론 돈까지 가지고 왔다

아내는 이상히 여겨서 물어보았지만 끝내 친구가 거저 주었다고 대답했다.

하루는 아내가 작심을 하고 아이를 데리고 면소재지에 있는 경찰서로 가자고 길을 나섰다.

아이는 끌려가면서도 가자고 같이 나갔다.

그날은 눈이 발목까지 빠지도록 쌓여있고 하늘에서는 계속 퍼붓는 중인 겨울이었다.

면소재지 경찰서까지는 4번 오는 버스도 지났고 눈 때문에 다시 오기도 힘들었다.

아이고 저 지독한 두 사람 봐라, 쯔쯔...’

나는 그냥 냅두었다. 아내의 성격을 알기에,

 

두 시간이 지나서 두 사람은 돌아왔다.

그나마 얼굴이 생각보다 밝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한 시간을 거의 걸어갈 때까지 번복을 안 하던 둘째아이가

경찰서 문 거의 다 가서는 잘못했다고 빌더란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고 다시 한 시간을 돌아서 왔단다.

정말 지독한 인간들...’

나 같으면 춥고 귀찮아서 아이를 쥐 잡듯 할망정 그런 고생길을 같이 작정하지는 않을거다.

 

둘째 아이는 나중에 중학생이 되어서 그 이야기를 글쓰기 시간에 냈다.

그리고 그 글은 학교신문에 나왔다. 그 바람에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아이도 참 별나다. 어쩌면 창피할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를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다니,

그런 식으로 아내는 아이들에게 일관성 있고 무서운 원칙의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반면 나는 그때 그때 다른 사람으로 추락하고...

 

내 속에는 그렇게 변덕들이 쓴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도 늘 그렇다 너무 좋은 사람 너무 싫은 사람으로 갈라서 담기도 한다.

그 기준도 내 취향 위주일 경우가 많아 참 불공정하기도 하다.

주면서도 좋은 사람이라고 추겨 세우고, 받으면서도 왠지 싫다고 하기도 하니,

이유가 없다. 일관성도 없다. 그래서 고스란히 세상이 살기가 무지 힘들어지는 벌을 받는다.

몽땅 내게로 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어서,

 

일치의 신앙을 추구하는 프랑스 떼제공동체로 들어서는 진입로에 놀이터가 하나 있다.

그곳을 일주일 묵으러 갔던 해 나는 그 놀이터에 세워져 있는 그림판 하나가 참 놀라웠다.

아이들 몇 명이 그려진 그 얼굴들에는 백인 흑인 황인종이 다 있었다.

인종과 국적, 신분과 노소를 평등하게 맞이하고 생활하는 떼제공동체 다운 그림이었다.

 

이재철목사님은 사도행전속으로’ 7권 첫 꼭지에서 안디옥교회를 차별이 없는 아주 보편적인 교회로 표현했다.

도저히 한자리에 만나거나 함게 있을 수 없는 각각의 사람 다섯명이 리더가 되어 운영한,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교회라고 했다.

정통파유대인 바나바, 흑인노예 출신 시므온, 무명의 이방인 루기오, 매국노였던 마나엔,

그리고 한때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던 대적 바울, 이 다섯명이 힘을 모았으니.

 

교회는 어떤 계층, 어떤 상태의 사람도 모두 들어오고 기도하고 용서받는 곳이라야 한다고 했다.

주님은 너무 다른 입장의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에서 이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으니,

 

더 중요한 것은 그 각 종류의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고 거부당하지 않아야하는데,

그것은 이미 먼저 와있는 모든 사람들이 또한 그들을 용납 수용해야한다는 전제가 되야 한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교회가 그런 하나님나라의 모습으로 살 수가 없게 되니까.

 

차별 하지 말고, 다양함을 인정하고, 심지어 죄인 병자 가난한 노예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자꾸만 교회가 지적, 영적으로 고상한 곳, 깨끗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우월감에 빠지고,

은근한 자랑이 차별이 되기도 한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심지어 작은 교회 무능한 교역자, 초라한 무지렁이 신도들은 찬밥으로 대접받고 무시되기도 하는 시대가 되어 간다.

 

개인의 내 속도 마찬가지다.

온갖 변덕의 소질을 가진 심성이 사람들을 자꾸 분리하여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일관성도 설득도 없는 행동을 하기도 일쑤고, 그러니 아이들에게서조차 아내만큼 대접도 못 받는다.

천국은 고사하고 집안에서도 팽당할까봐 염려된다.

 

각자 다른 모양과 신분, 성격과 재능을 차별의 기준이 아니고,

싫고 좋음의 잣대가 아니고 다름으로 보면서 너그러워지고 싶다.

그들이 미움 받기 전에 먼저 내가 늘 괴로워하는 벌을 받으면서도 정신 못 차리는 내 미련함이라니...

 

내 삶의 많은 불행, 불편, 괴로움, 실망, 그것들의 원인에는 그 수용의 너그러움이 없어서 오는 것들이 많다.

갈등이 생기고 조급함이 생기고 미움 때문에 부글거리고,

그러다 하루의 말미면 지쳐서 서글퍼지고 허무해지기도 하니까.

 

평안의 복은 내 혈액형부터 바꾸는데서 출발해야겠다. AB형에서 예수형으로!

다름의 차별에서 하나 되는 너그러움으로! 변덕의 불안에서 일관되는 노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