쩨쩨하지말고,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쩨쩨하지 말고,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는 속담이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엉덩이에 털이 났을까? 인생이 원래 울다가 웃다가... 다 그런 법이니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
성경에도 근심 중에 기쁜 일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건 울다가도 웃으라는 하나님의 배려이거나, 아님 명령일거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좀 곤란한 상황에 빠지거나 불행의 파도가 두어번만 연속으로 들이닥치면 정말 웃기가 힘들다. 얼마나 긴 한숨과 무거운 마음으로 땅이 꺼지게 바닥으로 축축 늘어지는지...
만약에 초상집에서 장구치고 춤추고 웃고 노래하면 어떻게 될까? 맞아죽거나 멱살잡이로 끌려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도의 다시래기나 전라도 무안쪽 장례풍습에 호상에서는 장구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게 문화로 엄연히 행해진다.
장자도 아내가 죽었을 때 다리뻗고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공자도 초상집에서 장구치고 노래하고 웃는 ‘자금장’을 흉보는 제자에게 그들은 세상 밖에서 노니는 자들이라며 그릇이 큰 사람들이라고 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이후의 세계야말로 간절히 몽매하고 기다리던 세상이 아닌가? 만나고 싶은 분이 있고, 가고 싶은 곳이었으니 노래(찬송)하고 웃고(감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사고나 혹 억울함으로 생긴 일, 너무 어린 나이의 헤어짐은 가슴 아픈 게 당연하지만, 때가 되어 자연스러운 떠남은 질병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기뻐해주면 좋겠다.
죽음조차 그렇게 받아들이는데 살면서 생기는 근심과 슬픔 중에도 웃을 일이 있으면 좀 웃기도 했으면 좋겠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좀 있다 죽을 지경인데도 드르릉 코를 골며 잠에 빠지거나 밥도 우라지게 잘 먹는 주인공들을 보게 된다. 참 멋지다! 그러면서 우리는 절대로 그러는 법이 없다.
성경에서도 바울도 베드로도 곧 목숨이 오락가락할 상황에도 잠이 깊이 들었었다고 나온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따지고 보면 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모어는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한 유머를 했다. 칼을 든 망나니에게 “이보게, 조심하게, 내 구렛나루 수염은 아무 잘못이 없다네! 잘리거나 구겨지지 않게 해주게!”라고,
그도 믿는 구석이 있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신념의 바탕이라도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보다 확실하고 힘이 센 하나님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는데, 살다가 닥치는 불행과 고난이 우리를 짖누르더라도 가끔씩, 아니, 일부러 찾아서라도 많이 웃자. 까짓 엉덩이에 털이 좀 나면 어떻고, ‘미쳤냐?’소리 좀 들으면 어떠랴! 한 번 심각해지면 사흘 나흘을 초상집처럼 푹푹 땅 꺼지게 한숨 쉬고, 누가 가까이 오는건 고사하고 십리 밖으로 도망가게 하지 말고!
속없고 실없어도 근심 중에 기뻐하고, 울다가 웃는 팔푼이가 되더라도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살고 싶다. 너무 그렇게 못살고 억눌려 사는 내 모습이 싫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