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왜 이러시나요? "그건..."
<우리에게 왜 이러시나요? "그건...">
아내는 절뚝거리면서 얕은 비탈을 올랐다. 산은 높지만 초입까지만 가면 되니까 조심조심하면서... 그렇게 날마다 작은 방에 들어가면 목이 터져라 ‘주여!’를 외쳤다 하루에 500번씩을 채우느라, 목이 쉬기도 하고 힘이 빠져 녹초가 되기도 했다.
어느 날은 폭 고꾸라져 흙바닥에 이마를 찧고 간신히 구르지 않았다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그때는 병의 초기이고 전신에 마비가 오기전이라 그 추운 12월의 날씨에도 간신히 그렇게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눈물, 발버둥이 무색하도록 두 달째 되는 날 완전한 사지마비에 떨어져 버렸다. 목조차 가누지 못하고 소변을 볼 수도 없어서 화장실 변기에 앉힐 수도 없어 방바닥에 쏟아놓기도 했고, 결국 침대에 누인 채로 딸기 담았던 빨간 프라스틱 그릇에 받아냈다. 그래도 나온다는게 다행인줄은 얼마 뒤 그것도 신경이 마비되어 나오지못하고 임산부처럼 배가 부어오르고 비명을 지르면서 알았다.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걸까?, 죄야 많고, 당장 고쳐질 가망성도 그리 높지 않다는 것도 짐작하겠는데, 차라리 한방에 훅! 때려 잡으시던지...’
그런 의문, 사실은 원망과 항의로 심통이 나서 종종 밥 먹다가도 욱! 치밀고, 집회시간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고개를 푹 숙이고 반항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돈도 떨어지고 밥값 숙소비도 두 달씩 밀리면서는 성경도 귀에 안 들어오고 한숨만 늘어 가기도 했다.
어느 사람이 떵떵거리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 들판을 헤메이며 미친 짐승처럼 살았다. 소처럼 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들짐승과 함께 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누군가가 경고한 말을 ‘웃기네!’ 그러며 무시하다가 벌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1년도 2년도 아니고 무려 7년을...
심부름하는 사람을 보내어 부디 가난한 이들을 잘 돌보고, 잘난 체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히지도 말라고 했는데도 자기가 힘이 세고 무엇이든 자기마음대로 되는 줄만 알았다가...
어쩌면 그 사람과 비슷한 처지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진작 정신 차리고, 서로 화목하게, 미워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평안하게 살라고 하는 대로 했다면 이렇게 몹쓸 상황의 병은 안걸렸을지도 모르니까, 그 느부갓네살 왕은 7년 만에 회개하고 다시 정상이 되어서 궁으로 돌아갔다는데 우리는 몇 년을 이렇게 바닥을 기어 다니며 살아야 하는 걸까?
송명희 시인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처지가 너무 서러워서 어느 날 하나님께 따졌단다.
‘하나님, 이게 뭐예요? 몸이 성하기를 하나, 휠체어도 없어서 교회도 못가, 봉사도 할 수 없어, 도대체 저를 사랑하기나 하나요?’ 라면서,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니가 지금 그 상태가 아니었으면 나에게 이렇게 다가와 매달리기나 할거니? 그래서 너를 불렀고 너는 내게로 와서 지금처럼 나를 찾지 않니? 나는 너의 기도가 무지 기쁘단다.’
결국 송명희 시인은 집세도 준비 못하고 돈에 쪼달리면서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원망하던 그 입으로 고백을 했다. ‘남들은 못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보고 들을 수가 있어서 공평하다고...‘
겉으로는 아무 형편도 처지도 바뀐 게 없는데도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 조건을 정하기도 한다. 말로 드러내고 하던, 속으로 작심을 하던, 죽을 만큼 아픈 사람은 병이 낫는 걸로 하나님께 조건을 걸고, 사업이 망한 사람은 무슨 방법으로든 다시 제자리로 일어나게 해달라는 조건을 건다. 그래서 금식도하고, 헌금도하고, 혹은 기브앤 테이크 공정거래 의식으로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다가 기다려도 소식이 없고, 때론 더 내려가고 덜컥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매달리던 강도의 반비례만큼 실망과 불신을 쏟아놓게 된다. ‘이게 뭔 살아 있는 신이라고...’그러면서,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슬그머니 마음에서 희망을 지운다. 함께 하나님의 이름도, 존재에 대한 기억도 같이...
세 사람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생사를 쥐고 흔든다고 믿는 신을 포기하고 금 신상에 절하던지, 아님 목숨을 포기하던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당장 죽일 힘을 가진 왕이 다그친 것이다. 이런 시험 들지 않고 신을 믿을 수 있는 시대는 연약한 사람들에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왕에게 말할 필요도 못느낀다. 우리가 믿는 신이 살아계신다면 분명 우리를 구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시더라도 우리는 그 분을 배신하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위기가 오기 전에도 그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조건부로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온전히 순복(순종으로 복종)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을 앞에 두고 흔들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서 조건이 없는 그들의 믿음이 죽음을 앞에 둔다고 새삼 조건이 생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기적은 그랬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데, 오히려 죽음의 문턱까지 몰리는데 공평하고 변함없는 평안을 가질 수 있다니... 살아서도 얼마나 숱한 사람들이 번민하고 불안하여 속병이 생기는가, 심지어 천하무적 같던 왕도 정신질환이 생겨 짐승처럼 되는 판국에, 그들은 이미 천국도 받고, 더 귀한 것이 없을 복을 받았으니 기적이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아내는 말고 나만 그런지도 모른다) 소심하고 얇아서 변덕이 수시로 오기도 하지만 깊은 절망의 순간마다 말로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을 느꼈다. 그건 겉만 보면 체념 같기도 하고, 포기 같기도 한 모습이지만 180도 다른 건 공포감이 없다는 것, 오히려 부드럽고 친절하게 할 일을 하나씩 할 수 있게 되는 신기한 상태가 된다는...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
-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송명희 시인의 ‘이 처지가 회복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칠배나 되는 뜨거운 풀무불 앞에서도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도 이 병이 세상 끝날 까지 사라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으로 평안하리이다! 기도한다.
느부갓네살 왕처럼 7년을 채우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주신다면 더 없이 고맙겠지만...
[오늘 안식일은 다니엘서를 읽으며 하나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