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비행기에는 없는 것?
‘반짝반짝 빛나는...’
치료실에 집사람을 데려놓고 돌아와 잠시 쉬는데 병실에 틀어 놓은 TV에서 어느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그런데 잠깐 한 부분의 대사가 사람을 울린다. 제목이 '반짝반짝 빛나는..' 뭐시기인데 엄마(고두심)이 심한 녹내장으로 실명이 된다는 진단을 받았고 딸이 대성 통곡을 하니까 아빠(길용우)가 이랬다.
"야! 차라리 화를 내라, 그렇게 울지 말고, 이 아빠 때문이라고, 내가 엄마를 소처럼 부려먹고 속 썩여서 홧병이 나서 저렇게 된 거라고..."
어디서 많이 듣던 익숙한 내용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입에 달고 살았던 멘트다. 집사람이 처음 진단을 받고 고생할 때 병실의 사람들이 내가 아내를 지극 간호한다며 칭찬하면 하던 말이다.
"나 때문에 속 상한 거 많아서 저렇게 병났는데, 간병하는 게 당연하지요"
이거 보다가 치료실에서 다른 치료로 이동해줘야 하는데 늦어버렸다.
"미안, 미안해! 잠깐 뭘 보다가 딴 생각하는 바람에~~"
기립성 저혈압을 치료하기 위한 경사침대에 묶어야 하는데 너무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느껴 어제도 간신히 했다. 70도 이상 경사로 30분은 매고 서있어야 하는데 45도로 간신히 하다가, 그것도 10분 만에 내렸다가 두 번 세 번에 나누어 했다.
"할거야? 너무 안 좋으면 오늘은 쉬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진데 그냥 해보지 뭐,"
"무슨 소리야? 이거 하는데 뭔 죽고 사는 각오까지??"
"....."
"사람은 다 죽거든! 아픈 사람이든 안 아픈 사람이든!
좀 빠르거나 늦는 차이 뿐이지 안 아픈 사람은 뭐 영원히 산데?"
그렇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기립성저혈압이 심하거나 전혀 없거나, 단련된 근육질이거나 허약한 사람이나 똑같이 죽는다.
"그뿐인 줄 알아? 삼성 회장이나 나나 죽을 때 십원 짜리 동전하나 손에 못 쥐고 빈 손 으로 발가벗고 가는 거 똑같애! "
그래서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던가?...
어제도 어지러워서 45도에서 멈추었는데 오늘도 45도까지밖에 못 세웠다. 요전 병원에서는 경사를 75도까지 서 있었는데 뒤로 돌아간 게 속상하다고 울상이다.
그런데 시간을 더 뒤로 돌려보면 45도를 5분도 못 버티고 내리고, 내리고, 그렇게 치료 받은 적도 있었다.주어진 사용시간 15분을 한 번에 못 채우고... 서울 삼성병원 재활치료를 받을 때다.
사람이 어느 쪽에서 오는 길이냐에 따라 같은 위치에 있어도 기뻐하거나 슬퍼하게 된다는 걸 알았다. 밥 먹다가 죽 먹다가 수제비로 내려가는 사람과, 굶다가 수제비 먹다가 밥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똑같은 죽이나 수제비를 놓고도 받아들이는 표정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 중이냐가 그렇게 만든다.
“험한 언덕의 중간에서 만난 두 사람도 같은 위치에서 쉬면서도 한 사람은 홀가분하고, 한 사람은 비장하기도 한다. 순전히 남은 길에 대한 예상 하나 때문에”
엄밀히 의학적으로는 내가 아내를 병들게 한건 아닐지도 모른다. 길용우씨가 고두심씨를 고생시켜서 실명하게 한 것이 아닌 것처럼!
너무 미안하면 의욕이 떨어져 그나마 할 일을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장난 비행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몸이 고장난 사람은 계속 날 수 있다. 더 멀리, 더 높이도 갈 수 있는 것은 비행기에는 없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