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는 아주 작은 자유...
늦은 밤 병원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을 바삐 걷습니다. 요즘 며칠은 계속 하늘이 잔뜩 시커멓고 고온다습, 더운 바람이 훅! 불어오기도 합니다. 그래도 10시나 11시정도의 밤늦게는 조금은 시원해서 다행입니다.
조금씩 걷는 속도를 올리다보면 숨도 빨라지고 몸에 열이 많아진다는 걸 피부로 느낍니다. 간신히 짬나는 짧은 시간에 많이 걸으려면 좀 빠르게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마에 땀이 방울 맺히고 등짝이 축축해지면 ‘힘들다’소리가 절로 납니다. 그 순간 얼굴로, 등짝으로 찰싹! 때리듯 서늘한 바람이 치고 갑니다. 그 시원함이란~~ 짜릿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자초해서 고생을 하고 있지?’ 벌써 2년이 넘도록 이런 밤 걷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안 죽고 살아나기 위해서 입니다. 또 내가 아파 누우면 아내와 아이들이 낭패를 겪기 때문입니다. 중증환자로 대소변도 스스로 안 되는 아내는 나마저 없으면 살아날 길이 도저히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야 뭐 이리저리 고생하다가도 세월이 가기만하면 살아나겠지만...
아무리 무서운 영화도 슬픈 영화도 시간이 지나면 끝이 나고, 모든게 해결이 납니다. 그런데 이 끝도 없고 병원에서조차 전망도 해주지 않는 난치병은 가끔씩 벼랑으로 몰아세우고 머리 어깨위로 쇳덩이 추를 올려 사람을 잡습니다. 그것도 귓가에 바짝 붙어 속삭입니다. “야! 그냥 끝내! 미련스럽게 버티고 버티고, 끙끙 당할 데로 다 당하다가 무너지면 개고생만 더 많이 하는거잖아? 왜그래 바보같이!” 라고...
전에 아내가 계속 꼬리를 물고 상태가 나빠져 잠도 못자고 지쳤을 때, 견디다 못한 아내도 화를 벌컥 내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8층이 병실이었는데 뛰어내려 버리고 싶어 머리를 유리벽에 막 박은적도 있었습니다. 개폐식이 아니고 통유리였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이고 하나님의 은총이었는지...
지금 있는 병원 옥상에 빨래를 널어 말리는 곳이 있습니다. 날이 좋은 날은 세탁물을 널러 올라왔다가 가끔 아래를 내려 봅니다. 늘 달고 사는 병원비 걱정, 아이들 뒷바라지 걱정, 또 나빠지지나 않을까 온갖 무거운 맘들을 품고 옥상아래를 보고 있노라면 깜짝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정말 무섭게도 뒤에서 곁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야! 뛰어내려버려! 발짝 하나만 내밀면 다 사라져! 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조정하는 그 속삭임...
기약도 없는 투병생활, 그냥 뛰어 내리면 다 해결 될 것도 같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번쩍 들어 저 아래 아스팔트 도로로 던져버릴 것도 같아 온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습니다.ᆞ 그러나 번쩍! 제정신이 든 나는 마치 누구에게 들으라는 듯 말합니다.
“야! 좋다 니맘 대로 해! 내 몸이야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영혼은 손 못 댄다. 이건 하나님거야 하나님 그렇지요? 만약 이거 못 지키면 하나님 사표 내셔야 되요?” 그러면서...
다시 기억해보아도 소름 돋는 순간들입니다. 다시는 그런 상태까진 안 가야겠다! 몸도 건강히, 마음도 건강히 하기 위해 밤으로 걷기를 시작 했습니다. 최소한 그날의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으로 가라앉는 몸 상태를 그날그날 풀어야 겠다 싶어졌습니다.
며칠 전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위내시경 간암검사 대장암검사 피검사등... 결과를 기다리는 중 입니다. 불안하기도하고 뭘 하면서도 안 좋은 상상이 불쑥 들어 일이 손에 안 잡히기도 합니다. 벌써 위염, 황달, 간수치 상승으로 서너번 약과 함께 경고성 진단을 받았던 터라, 그러면서도 할일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중증 장애인의 간병이고, 떼어 놓은 아이들의 부모 노릇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할 일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생명의 의무인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그리 살겠지요? 절벽 난간을 걸어가면서도 먹고 마시고 볼일도 보아야 하는 게 몸을 가진 사람의 운명입니다. 또 바라는 것을 기도하면서 남의 이야기도 듣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도우면서 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동안의 생명가진 존재들의 의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는 열심히 살아야하는 크리스찬은 더욱 그렇습니다. 깊은 암흑 속에 손으로 더듬으며 한발씩 앞으로 가는 심정의 겪어보셨는지요? 나 때문이 아니라 가족이나 누구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입장에 처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내 사정과 상관없이 남의 사정은 변함없다는 게 현실입니다.
예수님도 몰려오는 죽음의 잔을 피할 수 없냐고 피와 땀 맺힌 기도를 드리시고도 이렇게 말했지요? 사탄세력들에게 ‘너의 일을 해라! 나는 오늘도 내일도 내 길을 가겠다!’ 하셨지요. 죽고 사는 일들이 오가는 와중인데도 말입니다.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시한부 선고 같은 게 내리더라도 저도 그래야만 하겠지요? 제 수중에 있을 남은 돈을 쪼개 아내 병원비와 아이들 생활비를 준비하고, 작은 돈이라도 보내던 오지의 아이 후원금도 얼마라도 또 떼어 보내야 합니다. 그건 나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계속 돼야 할 일이고 옳은 일이니까요.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 그건 이렇게 걷는 데도 적용될 일이고, 긴 인생을 사는 데도 필요한 일입니다. 오래 지속되는 병원 생활에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멀어집니다. 혈육의 의무 때문에, 혹은 누구나 가지는 친구에 대한 도리나 우정 때문에, 또는 종교적으로 가지는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 등으로 참 쉽지 않은 방문과 지출을 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너무 길어지다 보니 지루해지고, 지치고, 마침내는 지겨워지게 되는 게 너무도 당연한 순서입니다. 법칙에 가까운 본능입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건 내가 그 입장이 되어도 그만큼의 반도 따라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겸손 아닌 예측을 해봅니다.
그래서 하나 둘 간격이 멀어지다 잊어버릴 만큼 낮 설어 집니다. 나도 연락을 안합니다. 그건 자꾸만 자연스런 평안을 거스르는 부담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주 들락거리고 풀어놓던 만남의 자리를 뜸하게 외면하고 말도 줄이고 지내는 중입니다. 너무 힘들게 해서 다들 도망 가버리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아주 들어주어야만 할 급한 상황이 올 때 말도 꺼낼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그건 남겨두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다보니 혼자 삼키고 달래며 지내는 지금이 좀 버겁습니다.
그래서 또 걷습니다. 자꾸 힘들고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고 배도 고플 정도로 몸이 고단해지면 당장 씻고 뭘 좀 먹고 누울 곳만 있으면 마음의 상념쯤은 어느 정도 뒷전이 되는 경험을 많이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배부른 생각은 배고프면 밀려나니까요.
오늘도 걷는 이 작은 자유와 걸을 수 있는 건강이 참 다행이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