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드리는 중간 보고 - 희망은 있다!
긴 병에는 효자가 없다고 했던가?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변하는 약한 존재인가보다. 물에 풍덩 순식간에 빠지는건 바로 알아도, 조금씩 부슬비에도 오래 노출되면 온몸이 다 젖는다는 걸 모른다. 그런데 이제 실감한다. 문득 문득 내 입과 표정에서 짙은 회색빛 향기가 나곤 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후.....'하는 긴 숨도 나오고, 작은 일에도 쌓인 피로를 터뜨려 놓는 자신을 발견하고 퍼뜩 미안해진다. 반성도 하게되고...
오늘 지나간 일들을 사진을 통해 보면서 정말 아내가 많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날마다 보는 아이들이 언제 자랐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쑥쑥 자라, 아기에서 어린이, 다시 청소년 청년이 되어 있는 걸 어느 날 알게 되는 것처럼!
그랬다. 아내는 아주 심할 때의 상태와 비교하면 날개 달고 하늘로 날아 갈 것처럼 좋아졌다. 두 손모아 빌던 간구들이 이루어져 있다는걸 의식못했다. 비록 아직 갈 길은 첩첩산중이고 잘 보이지 않는 새벽 미명이지만 한밤중의 칠흑같은 고개는 넘어선 것 같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감사도 제 때가 있는데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아직 풀리지 않은 어려움들을 핑계로 온통 무거워져서 입을 닫고 살았나보다. 사진을 보면서 달라진 사실, 회복시켜주신 부분들을 확인한다. 감사하며...
그리고 1분 안팎의 짧은 동영상 서너개를 올린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심지어는 당사자인 아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고 나만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에 손전화로 찍을 때는 나중에 다시 회복되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려고 했다.
이 정도 상태까지 좋아진데는 몇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미 얼마까지 회복이 되느냐가 사실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 생명 통째로가 시한부 인생이고,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태이던 상관없이 우리를 소중히 계획대로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예전에는 두려워하던 불안이 좀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사진으로 드리는 중간 보고서>
아이들 중학교에 자모회장도 맡고, 학교운영위원도 되어서 바쁘게 살던 아내는 내가 어쩌다 학교행사때 가면 나를 교감선생님이나 지역 유지들에게 소개 시켜주곤 했다. 지역에서는 나보다 더 알려졌고 열심히 살았고 건강했었다.
큰 아이 입시 준비들어가면 같이 등산도 한번 못할거라고 모처럼 아이 둘과 함께 산행을 했다. 억새풀로 유명한 강원도 민둥산으로, 이리 씩씩하고 튼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생활들이 중단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마치 우리들 생명을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같이 마음대로 하는 소유물로 알고 사는 사람들처럼...
강남 삼성병원만 가면 다 고칠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번에 걸친 응급실, 입원,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아내는 심신이 다 망가져가고 있었다. 몸보다 더 심한건 심한 우울증과 두려움, 환청 환각이었다. 결국 병원으로 더 이상은 갈 수도 없을 만큼 심각해졌다. 누가봐도 치료보다는 감금쪽으로 진단이 내려질 형편이었다. 결국 산 속 깊은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이 날이 2008년 12월 25일 성탄절, 예수님이 오신 날 아내는 기도원 예배실 바닥에 누워 눈물지으며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더 심한 중증 장애가 곧 이어 닥칠줄은 꿈에도 몰랐다.
혼자 세상을 떠돌던 둘째아이를 기도원으로 불러들였다. 생계와 간병을 동시에 해결하기엔 내 한몸으로는 불가능했기에 어쩔 수 없었고, 둘째 아이는 그걸 모를만큼 둔하거나 심성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불려온 강원도 깊은 외지 기도원에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해야 했다. 그것도 기도원 방과 마당만 오가며 갇힌 생활로... 2009년 첫달인가? 그랬을거다. 지친 아내와 아들이 서로 기댄채 잠시 쉬는 모습, 때론 부모도 다 갚지 못할 신세를 자식에게 지는 법도 있다는걸 경험 했다.
더 심한 상태로 호홉마비가 되어 강릉 아산병원 응급실로 다녀오고 난 후, 꼬박 붙어 있느라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기도원 밥값도 두 달, 석달째 밀려나가고 더 버틸 수가 없어서 시골 집을 급히처분하고 그 계약금으로 밀린 식대를 내고 5개월만에 충주로 돌아왔다. 충주시립요양원에 공동간병을 맡기고 일과 간병을 병행했다. 아침 저녁으로 병원으로 가서 운동을 시키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 살림을 대충 치우는 시절, 나도 많이 지치고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심한 피로와 영양결핍으로 간이 나빠져 황달이 왔다. 아내는 석달이 넘도록 종이컵만큼의 흰죽으로 세끼를 떼우며 버티고 있었다. 2009년 7월 kbs1 생로병사의비밀 팀에서 촬영을하고 방송해주었다. 그 시절의 기록이 그렇게 남았다.
결국 폐까지 마비가와서 다시는 들어가지 않으려던 강남삼성병원응급실로 또 들어갔다. 3개월을 흰죽만을 먹고 토하고 하며 보내는 동안 아내는 몸무게가 많이 빠져 40키로 초반까지 내려갔다. 근 20키로 가까이 빠져나갔다. 삼성병원 뒷쪽 산책로로 아내를 데려가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모처럼 바깥 바람에 조금은 편해진 아내, 그럼에도 머리를 받치고 팔은 배게로 고여야 하는 죽은듯 늘어진 신체...
무우 다리라고 놀릴 정도로 튼튼하던 아내의 다리는 정말 통뼈만 남았다. 그나마 뼈가 굵어서 더 가늘어보이지 않는 것도 기뻐해야할까? 근육과 살들이 다 빠져나가서 어디 닿으면 곧잘 피부가 벗겨지고 멍들곤 했다.
2009년 9월, kbs1 사랑의리퀘스트에서 모금방송을 해주고 거의 포기하고 있던 우리에게 새 치료법을 찾아볼 의욕을 주었다. 여전히 검사와 여러가지 시도들을 해보았지만 별 뾰족한 변화도 대책도 없던 참에...
전신이 마비되어 '사지마비'로 진단서를 발급받았다. 그 상황에서 완치가능성은 없고 '악화되지 않도록 예방'이라는 표현은 생명이나 유지하는 정도를 목표로 삼아야한다는 슬픈 통보였다. 전문가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데이터만을 놓고서 책임있는 말을 하기엔 거기까지 였다.
목도 혼자서는 가누고 세울 수 없는 아내는 휠체어에서 침대로,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 앉는 것 자체도 큰 일이었다. 아들과 팔 다리를 나누어 들어 옮기는 일이 많이 지쳐있던 내겐 그것도 무거웠다. 40키로 초반의 예전과 비교하면 미이라 같아진 아내인데도...
침대에 붙박이로 붙은 물건처럼 아내는 그렇게 침대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머리감고 목욕하는건 말할 것도 없고 소변도 대변도... 그나마 스테로이드 긴급처방으로 연달아 응급조치를 한 후 밥은 먹기 시작했다. 몇 달만에 먹는 밥, 욕창을 막으려고 몸을 돌아눞히기 위해 쿠션 배게를 늘 침대에 끼고 살았던 시절, 기저귀와 면패드가 주변에서 머물기 시작한 시절...
응급조치 후 떠밀려 퇴원, 다시 병원 유랑길로 나선 2009년 추석무렵, 용인의 어느 병원에서 명절을 맞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불러 간신히 추석을 보내고 이틀만인가? 다시 또 삼성 응급실로 직행을 했다. 심한 고열과 두통 고열로, 몇 번 째인지 세는걸 놓쳐버린 재발... 이번엔 또 어디가 고장이 나는걸까??
가장 심한 상태에서, 가장 많은 치료를 받으며 지내던 2009년의 국립암센터 성탄절날, 방송국에서 마련해준 돈을 한번에 다 쏟아부으며 치열하게 매달리던 100일 정도의 기간이었다. 항암치료제 5번, 피를 교체하는 혈장교환을 15번, 항생제와 수액은 떨어질 날이 없이 거의 달고 살았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고난의 순간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의 자리였다. 그대로 끝나든지, 아니면 더 나아지는 기로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뒤로 하나 둘씩 회복되는 반환점이었던 것 같다. 돌아보니...
눈은 망가지고 폐도 말썽이라 씩씩대고, 사는게 더 괴롭다는 말 내밷어도 모두 수긍할만큼 험해보였지만...
면역기능을 거의 억제시키는 치료과정을 통해 무방비 상태가 된 아내는 걸핏하면 장염, 방광염, 감기로 수액과 영양제, 항생제를 달고 살았다. 회복도 쉽게 빠르게 되는 법이 없었다. 고열로 물수건을 이마에 올리고 널부러지기 일쑤였던 시기,
그래도 치료가 시작되었다. 침상에 누운채로지만, 재활의 길고 긴 오르막길을! 힘들지만 분명 죽음으로 달리던 방향에서 살아나는 쪽으로 유턴을 한 시점이었다.
잠시만 앉혀도 쌕쌕거리고 땀으로 온몸을 적시던 시절, 치료사 선생님들의 노력은 환자와 다를바 없는 투병의 동행 같은 수준이었다. 당장은 눈에도 안보이지만 모여서 시간이 지난 뒤에 올 회복을 분명히 확신하는 분들!
묶어 세우고,
붙잡아 세우고!
모타가 달린 자전거에 메어 돌리고...
근 일년 반만에 보조기를 잡고, 선생님이 뒤에서 부축을 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두 다리에 힘 주고 선 날! 믿어지지 않고 가슴 뭉클했던 날이다.
한 번 잡고 서보면 이 삼일 몸살나고, 그러다가 두어달 만에 또 잡고 일어나보고, 그렇게 반복하기를 또 일년 가까이, 그사이 조금씩 횟수가 잦아지고 안정감이 들어보였다.
덩달아 나의 간병생활도 바빠졌다. 한 겨울 벽이 너무 추워 알미늄 방한폼을 다 부치고, 빨래를 개고 있던 날, 아이가 찍어주었던가?
한쪽 눈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결국 나중엔 실명되었다...) 잦은 탈도 왔지만 표정은 밝아졌다. 살도 붙고!
드디어 비록 왼손만 움직이지만 그걸로 밥숟가락은 스스로 들게 되었다. 반찬은 아직 나의 일이지만, 이것도 얼마만의 복귀인지! 나의 일이 조금식 줄어드는데 아직도 힘든 처리가 많아 여전히 헉헉거렸다.
가장 좋은 것은 팔로 딸아이를 안아볼 수 있게 된것이다. 예전에 사랑의리퀘스트 방송 촬영때 팔을 움직일수 없어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하는 걸 보면서 당시 같이 촬영 한 견미리님이 눈물울 글썽였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서 포옹이 가능해졌다. 귀한 딸, 귀한 가족을!
이후로도 왜 파도가 몰려오지 않았을까만 아이의 응원을 받아가며 버텼다.
한쪽 팔은 아직 안 들어올려지지만 계속 좋아질거라 믿으면서!
딸 아이가 두 해나 계속 주동했던, 단체로 아프리카 신생아 털모자 떠주기에 엄마로 동참하겠다고 도전을 했다. 거의 한달가까이 씨름하고 하나를 완성했었나? 물론 이 뜨개질도 예전에 꿈도 못꾸던 도전이고 기쁨의 선물이 되었다.
아직도 감각은 돌아오지 않아 무엇을 느끼려면 볼에 갖다 대어본다.어느 분이 성탄선물로 보내주신 십자가의 감촉이 궁금해 볼에 대어보는 아내, 언젠가 손에도 감각이 돌아오는 날이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눈치 채지 못하는 동안에 좋아진 힘들로 병상생활중 거의 몇년만에 처음으로 장시간 외출을 감행했다. 다른 병원을 가는 나들이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긴 시간을 바깥에 있을 계획으로 버틴건 처음이었다. 갈릴리마을에서 열린 야외음악회를 참석했을 때! 다녀오고 일주일 가까이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지만~~
(아래는 정말 다시 기억도 하고 싶지 않고 지금도 이해를 하기 힘든 동영상들이다. 찍은 나 외에는 아무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었던 모습, 삼성병원에 입원중 이상 반응이라며 연구용으로 촬영을 허락해달라고 재활의학과에서 의사가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서너번 비디오 촬영을 해준적 있지만 그네들은 불과 일부분의 의학적 관점에서만 보았다. 전부를 보고 겪은 나와는 다르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와 집에서 겪은 일들이란... 차마 말로도 설명이 괴로운 일들이었다.)
한 번 흔들기 시작하면 짧아도 한 시간, 보통 두 시간 가까이 흔들고 돌리고 온 몸이 땀으로 젖을 정도가 되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곤 했다. 처음에는 아내나 나는 몸에서 생기는 자연 회복 움직임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내의 말이 하나도 안아프고 하고 나면 시원해진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행여나 의사들이 알면 또 검사에 투약에 주사 줄까봐 비밀로 쉬쉬했다. 흔들고 돌리다가도 의사가 오면 안 하는척 하고 조용히 있기도하고, 하지만 신기하게도 억지로 못하게 하려고 내가 잡으면 무지 센 힘으로 억지로 계속하는 것이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센 힘으로! 마치 속에 누군가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한번은 내가 같은 각도로 손목을 꺽거나 어깨를 돌리면서 따라해보았다. 십분도 따라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너무 힘들고 심지어 아프기까지 했다. 차라리 두 시간을 달릴 수는 있어도 몸의 한 부분을 두 시간씩이나 돌리는건 더 힘든 현상이었다.
병원에는 대충 숨기고 집으로 퇴원한 후에 아내는 더 심한 증상을 보였다. 양팔을 빙빙 돌리거나 상체를 요란하게 흔들기도 하고... 뭔가 섬찟한 느낌의 이상 반응은 계속 되었다. 그리곤 몸만이 아니라 말도 이상한 표현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점점 깊은 낮선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지친 몸으로 새벽기도회를 날마다 데리고 나갔다. 일을 나간 후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친정집으로 옮긴후라 차로 한참을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상한 말들, 교인들을 마귀가 씌였다고 한 명 두명 내게 고자질 하더니 심지어 다윗과 헨리 나우웬, 테레사수녀도 다 지옥에 가 있다고 말했다.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면서 방언이라고 서슬퍼렇게 나를 꾸짖었다. 심정이 암담하고 처참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힘으로 감당 못해 교회 사모님께도 도움을 요청했다. 사모님이 자기를 시기한다고 나에게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나아진 지금도, 그렇게 잘해주시고 서로 칭찬해주는 신앙의 자매 같은데 그때는...
결국은 목사님과 집사님들, 권사님들을 동원해 7-8명이 둘러 앉고 아내를 가운데 앉히고 성전에서 기도를 해주다 손들고 말았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와 폭언, 환각 상태를 감당 할 수가 없었다.
길고 긴 싸움이었다. 본인도 가족들도... 사랑의 기도를 해주시는 분들 힘으로 영적혼란을 극복하고 나니 다음은 온 몸의 마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에 그렇게 힘들게 하던 순간에는 맨발로 산으로 뛰어갈만큼 이상하게 몸이 멀쩡하고 힘이 넘쳤다. 정말 이해할 수 없도록, 얼마 전 옆 환자와 그 당시의 장면을 생생히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아! 이제는 다시 그 악몽으로 빠지지는 않겠구나 안심이 되었다. 그 후로 몇년은 눈빛만 이상해도 가슴이 철렁하고 바짝 긴장해서 눈치를 살펴야 했었다.
많은 것들이 교대로 오고 가고, 어떤 것(시력 실명)은 그냥 후유증으로 남았지만 참으로 불가능하다고 의사들이 전망하던 것들이 회복되었다. 국립암센터의 담당 선생님조차 기대를 훨씬 웃도는 결과에 놀라워하며 기뻐하실 정도니,
하지만 아직도 남은 길이 멀다. 이것은 단지 중간에 서서 돌아보는 것들이다. 우선 아내의 진료기록에 분류된 '희귀난치등록자' 외에도 '중증대사장애 질환자'라는 타이틀을 벗어야한다. 쉽게 말해 소변 대변이 스스로 안된다는 것이다. 마비된 방광신경은 누군가의 손길이 3시간을 넘기지 않고 필요로 하며 마비된 대장신경은 약의 힘을 빌어 규칙적으로 강제 장청소를 해야만 한다. 이것이 가능해지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혼자 지내는 것도 거의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주기적으로 피검사를 통해 면역세포를 억제해나가는 예방적 치료가 계속 될지도 모른다. 보험적용을 받는 꿈같은 그날이 오거나, 점점 간격이 멀어져서 부담이 줄어드는 길 외에는 평생 가져야할지도 모를 부담, 계속된 재활치료를 통해 더 좋아지는 기대를 할 수도 있는데 재발이 오면 수포로 돌아간다. 다시 원위치로 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장기가 또 마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립성저혈압도 큰 장애물이다. 재활치료를 좀더 많이 강하게 할 수 있어야 효과도 커지는데 기립성저혈압이 치명적으로 가로막는다. 앉거나 서기만하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중추신경장애를 일으키는 기립성저혈압...등을 받치지 않고 몇시간을 버틸 수 있어야 무엇이든 치료계획을 늘릴 수 있는데 그게 잘 안된다. 더구나 날짜와 반비례로 보험적용 치료는 점점 줄어들게 해놓은 제도 아래서 곧 보험치료는 손을 들것인데 혼자 운동이 가능하지 않으면 답답할 일이다.
세월이 길어지면서 약해져가는 보호자인 나의 건강도 염려스럽지만 명함도 못내놓는다. 그저 알아서 유지하고 최대한도로 나빠지는 시기를 늦추기 위해 날마다 걷고 마음을 추스린다. 몸과 마음 상태는 아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중간 보고서의 전부다. 언제 마무리 보고서를 쓸 날이 올지 모르겠다. 빠를 수도, 늦을 수도 있고,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애쓰고 자기 몫을 잘 해준 아내나 나, 아이들, 도움을 주는 주변 사랑의 채권자들, 모두의 흔적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기억으로던 하나님의 포상으로던, 틀림없는건 하늘나라의 평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