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결국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검사결과가 며칠 안에 올라와서 항암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아무래도 지친 몸 상태에 마음마저 무거워질 것 같아 조심스레 이런 저런 말로 보호매트를 깔고 이야기 했지요. 그러나 결국은 눈물 샘만 터지게 했습니다. 서럽고 속상하고 걱정되어 마음과 달리 주루룩...
한동안 말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리곤 빙빙 돌면서 한 애기 또 하고, 한 애기 또 하고... 예전보다 얼마나 좋아졌느냐, 막다른 절망감에 빠져 힘들었던 기억을 비교해봐, 이건 슬픈 일도 아니고 막막한 일도 아니지! 그 전에 비하면..., 그래보아도 듣는 건 귀고 나오는 건 눈이니 서로 다른 기능이 확실합니다. 듣는다고 슬픔이 멈추는 게 아니라는 지극히 과학적 감정을 확인했습니다. 그저 묵묵히 말없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아이들과 저에게 아내는 별명이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것도 휴일이면 영락없이 아파서 눕는 휴일 전용 종합병원... 아이 셋 낳고 몽롱한 꿈에 취해 시골로 온 가족을 끌고 내려 온 가장을 따라 온 아내는 일하고 또 일하고, 조카 둘에 시어머니 모시는 일까지 맡았습니다. 장인 장모님과 같이 살 때는 친정과 남편사이에서 눈칫밥 먹더니, 시집살이하면서는 수 십 명 시댁 손님 치르기로 삼키는 밥 먹었습니다. 신혼 초에도 그러다 덜컥 갑상선 병이 걸려 고생했는데 반복을 했습니다.
온갖 자연 예찬론만 늘어놓고 생활비 좀 벌어온다는 명분으로 걸핏 자빠져버리는 나를 대신해 작은 텃밭의 풀 뽑고 모종 심고 가꾸는 일을 다 도맡았습니다. 누가 오면 시찰하듯 자랑은 내가 다 차지하고, 마당에 고기 구워먹고 가마솥에 추어탕 끓여먹자는 바람은 다 서방님인 제 기쁨이었습니다. 준비하고 뒤를 치우는 건 늘상 아내의 몫이었고... 한 달에 쌀을 한가마니씩 먹어 치우던 살림이었습니다. 그러니 온 몸이 골병 투성이 되고 쉬는 날만 골라 드러눕는 휴일 종합병원이 될 수밖에요. 참 무심한 서방님이고 남의 편인 ‘남편’이 었습니다.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어느 날 문득 목이 뻐근하다고, 고개를 돌리기도 아프다는 말에 ‘또 아파?’ 속으로 그러며 잠을 잘 못 잤나본데 이삼일이면 나을 걸 가지고 뭘 엄살이야,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다 한쪽 팔이 유리조각으로 긁는 것 같다가 전기가 흐르고, 밤이면 머리가 깨지고 앉아서 밤셀 때, 병원가서 빨리 주사맞고 약 지어먹지 않는다고 대따 짜증스럽게 몰아쳤습니다. 자기 몸 자기가 좀 알아서 챙기지 미련스럽게... 그런 흉이나 보았지요.
열흘, 한 달이 가고 점점 힘도 빠지고 허리 다리까지 통증으로 힘들어 걷기도 불편하다고 할 때 참 야속했습니다. 집에 돈이 쌓인 것도 아니고, 같이 일해서 조금이라도 생활비 벌어보태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것 다 접고 아프지라도 말아야 도리 아닌가? 뭐 그런 비난만 가득했습니다. 속으로... 일하다 틈틈이 병원 데려주고 데려오면서 얼른 낮지 않아서 힘들었고, 한 달을 멀리 수원으로 가서 치료받게 되었을 때, 한 달 정도 기꺼이 아이들 챙기고 살림 살아 주는 대단한 희생을 해주면 다 끝나겠지? 앞으로 두고 두고 내게 감사할거야! 그런 때가 있었다고 생색내면서 말이야, 그렇게 단순하고 철없는 생각만 했지요. 폭풍이 몰려오는데 우산 하나들고 준비 끝! 그러며 투덜거리는 미련한 사람처럼...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몸도 마음도 다 지치고, 직장에서도 친인척 형제들에게도 우환 애물 덩어리가 되어가던 시절,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는 쾡한 눈으로 불안과 고통스런 눈빛을 가지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남들은 종일 땀 흘리고 귀가하면 맛있는 식사와 왕의 귀환처럼 대접 받는 즐거움이 있다는데, 예전에 나도 누려보았던 것처럼, 그런데 일할 때보다 더 힘든 상황을 줍니다. 솔직히 불쌍하면서도 내 신세나 해결의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때론 집으로 돌아오는게 싫어 빙빙 시내로 우회도로를 헤매다 귀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새벽마다 천근 무게 같은 몸 일으켜 추위를 무릅쓰고 기도회라도 가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와 이상한 스토리로 남은 마음 마져 열 갈래 스무 갈래로 찢어놓기 일쑤였습니다. 저녁이면 기다렸다는 듯 퇴근한 내게 옷을 태워버려라. 성경을 태워라. 도저히 수용하기 힘든 끔찍한 말을 두시간 넘도록 하고 할 때는 죽지도 못하는 금지명령이 한스러웠습니다. 설사 허락한대도 남아서 처량해질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빼도 박도 못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종일토록 방에 요를 깔고 앉아 벽만 바라보며 12시간을 버티는 외롭고 무서운 아내의 심정은 모른 채...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기도원 골방에 누워서 주는 밥 먹고, 5일을 일하고 주말에만 오는 남편을 기다리며 살던 아내가 참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보러 가는 금요일 밤도 무겁고, 놓고 일터로 떠나오는 월요일 새벽도 무겁고..., 온통 불안과 통증과 외로움으로 범벅이 되어 짐승보다 편치 못하게 생존을 유지하던 시절을 마치고 기어이 다시 요양병원으로 입원했을 때, 종이컵 하나만한 흰 죽으로 세끼를 다 떼우며 3개월을 버텼지요. 난 그 흰죽 한 컵을 채 못 먹고 숨 막히는 사람처럼 씩씩대고 헛구역질을 하는 아내가 불쌍하다가 밉다가, 다시 불쌍해지는 고문을 혼자 당하며 삭혔지요.
마침내 폐가 문드러지고 날마다 열이 오르고 내리더니 한밤중에 차에 실려 종합병원 응급실로 들어 가던 날, 이제 더 갈데가 어디일까? 남은 내리막 길을 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혹 나쁜 놈, 잔인한 놈, 치사한 남편, 그런 손가락질을 듣더라도 할 수 없다는 막다른 배짱이었지요. 뭐 어쩌라고? 대한민국 최고 병원 일류 의사도 못 고치겠다는데 내가 뭐 어쩌라고?... 그런 심정으로, 나는 마음 한 번 다르게 먹고, 눈 길 한 번 다른 곳으로 돌리면 잊어버리고 쉬기라도 할 수 있지만 몸에다 문신처럼, 낙인처럼 들러붙은 통증을 안고 씨름하는 아내는 24시간 중 단 5분도 벗어나지 못하는 줄도 모르고...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뻑 하면 설득이랍시고 구구절절 앉혀놓고 사정인지 명령인지 애매한 동원고지서를 던졌지요. 그러면 둘째아들은 내키지 않는데도 뿌리칠 수 없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밤중이고 새벽이고 차에 실려 같이 병원으로 갔습니다. 이른바 엄마 간병인으로 징집...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몇 번인지 잘 셀 수 없는 여러 번의 긴급 호출에 그렇게 아이는 시간을 죽이고 청춘을 팽개쳐야
했습니다.
기도원에서 방에 가두어 놓은 원숭이처럼 두 달이 넘도록 엄마 밥 먹이며 자고 먹고, 다시 자고 먹고만 하게 했더니 아이 입에서 ‘미칠 것 같다...’는 마음 아픈 비명이 나왔습니다. 그걸 들은 아이 엄마는 또 그렇게 답답하며 방에 갇혀 지내는 사지멀쩡한 아들을 보는게 힘들었나 봅니다. 내게 그 이야기를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짐작하곤 아들을 휴가 보냈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그리 만만치 않고 또 응급실로 가야할 상황이 닥쳤습니다. 단 얼마라도 병원비를 벌어야하는 나는 또 일터로 왔다갔다 해야하고... 그러다 마침내 완전히 해방시켜주었습니다. 죽던지 살던지 내가 붙어서 엄마를 돌볼테니 잊어버리고 니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그랬더니 아이는 군대를 지원하고 입대했습니다. 아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아내와 둘이 해결해야하는구나... 외롭고 쓸쓸하면서 한편 고생많이 시킨 둘째아들이 안쓰러웠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그랫지만...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병원 생활에 지치고 하루 한 가지 이상의 소동과 쥐어짜는 답답함을 다스리며 숙제들을 풀어가는 중에 떼어놓고 전화질만 하는 딸아이에게서 두려움 담긴 호출이 왔던 날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엄마와 아빠의 품에서 떼어 놓고 느닷없는 이별을 일상생활로 받아들이며 살라고 했지요. 다른 대안도 없고 병실에 데리고 침대밑에 숨기고 키우기는 너무 큰 덩치에 나이였으니...
‘아빠 나 피가 나... 어떻게 해?’ 무슨 말인지 가까스로 파악하고 아내와 딸의 중간에서 통역이 되어 구급차원의 해결방법을 알려주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주느라 변신! 호들갑을 떨어야 했습니다. 축하해! 곁에 있었으면 꽃다발도 주고 선물도 해주어야 한다는데 미안하구나 하면서... 이른바 초경, 딸아이의 소녀시대 진입을 그렇게 멀쩡한 부모와 생이별 상태로 혼자 맞이하고 전화로 치른 딸아이가 안타까웠지요. 달리 뛰어 갈 거리도 아닌 먼 곳에서 달려갈 수도 없는 발목에 수갑 찬 사람이 되어...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찬바람이 쌩쌩 불어대는 한 겨울, 12월의 강원도 날씨는 많이 추웠습니다. 더구나 눈이 쌓여 얼어붙은 도시의 한겨울이란, 열흘 후 군대로 들어가는 큰 아이를 눈발이 휘날리는 12월 25일 성탄절날 교회에서 헤어졌습니다. 논산훈련소로 들어가는 아이를 강릉 한 교회 마당에서 말입니다. 거동도 불편하고 잘 먹지도 못하며 이동은 더 어려운 엄마와, 그 엄마를 돌봐야하는 아빠인 나도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잘 가라’ 손 흔들어 시외버스터미널로 보내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두 살 아래 동생이 훈련소까지 동행해주는걸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지갑과 소지품을 받아 돌아 온 둘째아들의 말로는 울지도 한탄하지도 않고 평안하게 훈련소 정문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따라가주는건 고사하고 따뜻하게 지은 밥 한그릇 못 먹이고 군대로 들여보낸 어미는 그개 가슴아프다고 늘 기억하고, 나는 그걸 기억하며 미안해하는 아내를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정작 군대를 들어가는 아들에게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애비라고...그런 자괴감도 들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몸과 마음, 신앙과 형편이 모두 추락한 우리 가정을 도우려고 여러 곳의 많은 분들이 힘을 모아주었습니다. 마음 가는데 따라가는 재물과 함께 도움을 주셨습니다. 예전 일해서 번 돈으로 당당하게 살 때라면 상상도 못할 기약 없고 이유 없는 도움입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분들이 돌려받거나 감사의 인사 한마디조차 들을 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보내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만도 아니고...
정해진 횟수나 기간도 없이 계속 받기만 한다는 처지가 참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 귀한 결정들이 소멸이 아니라 투자가 되고 싹으로 자라나는 곳에 쓰여진다면 얼마나 더 값질까 미안함도 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절하거나 사양도 할 수 없는 게 또 지금의 현실입니다. 대놓고 넙죽 받지도 못하고 편안한 상태로 사양도 못하는 어중간하고 구부정한 위치에서 받습니다. 아직 자립이 안 되는 몇가지 올가미들이 떠나지 않아서 선택의 여지가 적습니다. 마음 무겁게도...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울고 입술을 지긋이 물던 아내를 달래놓고 새벽이 넘어가도록 잠에 들지 못하는 한 무능한 가장이 긴 회상에 잠겼습니다. 사람이 욕을 먹거나 칭찬을 받는 것이 순전히 한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안되는 경우가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왜 그런 처지에 놓이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돌아보니 참 여러번, 많이 미안했습니다. 이 말을 되풀이 하게 됩니다.
<그때 그랬었지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하게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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