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페이스북 - 가난한 고지론자
고지론과 저지론의 여러 종류를 알기 쉽게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많이 공감도 하고 저는 어느쪽일까를 비추어보며 읽기도 했습니다. 때론 이것도 되고 때론 저것도 되기도 하는 애매한 저를 보면서 아! 어느 한가지를 일관성 있게도 못 사는 나는 ‘짬뽕론자’이구나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습니다.
어떤 분이 예수님을 참 고지론자의 모델로 말하시는걸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지론자는 고지에 오를 능력으로 저지를 온통 관심가지고 사는 분으로 정의를 해도 되겠지요. 사실 성경에도 그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이 일은 요한의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사도행전 10장36-37절> 하는 부분입니다.
고지론자는 많은 능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소유’가 아니라 ‘관리’와 ‘운영’에 머무르는 사라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도 모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것을 가졌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세상보다는 천국을 받기를 원하는 가난한 사람말입니다.
하루 종일 햇빛 한번 들어오지 않는 지하방에서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반 지하 정도로 창이 있는 집들이 많지만 아주 예전에는 완전한 땅 속에 만들어진 작은 다세대빌라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겨울은 그런대로 살만하다가 여름, 특히나 장마철에는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바람 한 점, 햇빛 한 시간도 방에 들여 놓지 못하는 방은 온통 습기와 냄새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살던 시절을 잘 넘기고 창문이 달린 지상의 단칸방으로 옮긴 날 그 집으로 들어간 세 식구는 햇빛 들어오는 창문을 감격하여 눈물로 감사드리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단지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는 방이라는 이유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햇빛 들어오는 창문이 달린 집에서 살지만 그들이 모두 그렇게 감격으로 눈물흘리며 감사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그 가난함은 창문하나에도 행복이 넘치며 하나님께 다가갑니다. 정말 하늘나라가 그들의 가슴에 소유되었습니다.
가난한 심령, 즉 가난한 마음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 빈부에 상관없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것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냥 그래야지 한다고 생기거나 유지 되기는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 가난한 마음은 자기에게 의지하였다가 쓰라리게 절망해보았거나 그로 인해 자기를 믿는 것을 포기해본 사람만 가능한 마음입니다.
자기 능력, 자기 재능, 자기 인맥... 그 어떤 것으로도 꼼짝할 수 없는 구석에 몰려본 사람만이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인정하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실패와 죽을 만큼의 절망은 가난한 마음을 생기게 하고 유지하게 하는 힘이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능력 있고 부유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지 않고 가난한 갈릴리에서 시작한 이유입니다. 가난한 갈릴리를 잊지 않고 자기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만이 참 예수를 닮을 수 있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짜배기 고지론자가 아닐까 싶은 마음입니다.
위세 있는 예루살렘에서, 인정받고 머무르고 싶어 하는 고지론자 생각보다 많은 우리 개신교의 현실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재능있고 열심인 사람이 재능없고 게으른 사람보다 더 심한 피해를 세상에 끼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건 마음이 올바른 목표를 보지 않을 때입니다. 차라리 재능없고 게으르다면 한 사람의 피해에 그칠 것을 자기도 빗나가며 남도 빗나가게하는 악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재능은 없으나 열심히, 올바른 길에서 살고 싶습니다. 김동호목사님은 재능있고 열심히! 올바른 목표를 바라보시는 분으로 존경합니다. 예수를 닮아가시는 참 고지론자가 되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의 시선으로 힘을 얻는 초짜신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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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제일 열심히 했던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역 중에 하나는 KOSTA 사역이었습니다.
2. 1992년 여름 미국 KOSTA에 처음 강사로 초청을 받아서 한 설교의 제목이 '고지를 정복하라'였습니다. 그 설교가 테입을 통하여 퍼져나가면서 고지론 논쟁(?)이 시작되었으니 고지론 논쟁은 올해로 2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3. 많은 비판과 비판을 넘어선 비난들이 있습니다. 저를 염려해 주시는 분들 중에 힘들지 않느냐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힘내라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4. 당연히 감사하지만 힘내라는 격려를 받을 때 제가 마음 속으로 갖는 생각이 뭔지 아십니까?
5. '여기서 더 힘을 내면 어떻게 하라구?' 지금도 힘이 너무 뻗쳐서 주체가 안 되는데(????!!!!....)
6. 오늘 아침에도 이 글을 쓰려고 얼마나 잠을 설쳐대며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어제 쓰고 싶었지만 나름 절제하느라 애썼습니다.
7. 혹시 이미 계속 반복되는 이 이야기에 지치신 분들이 있으실까봐 염려가 되지만 저로서는 괭장히 중요한 이야기라 생각되어 나름 소명감을 가지고 이러고 있으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8. 고지론자 중에 두 종류의 고지론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9. 하나는 소명을 가장하나 실제로는 야망으로 고지를 정복하려고 하는 고지론자.
10. 또 다른 하나는 그 수가 많지 않아 찾기 쉽지 않아 보이나 정말 소명을 가지고 고지를 정복하려고 하는 고지론자.
11. 저지론자 중에도 두 종류의 저지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12. 하나는 정말 소명을 가지고 저지와 미답지에서 일하는 저지론자.
13. 또 다른 하나는 저지에는 가본적도 없고 솔직히 앞으로 갈 계획도 없는 저지론자입니다.
14. 보편적으로 볼 때 고지론자는 전자의 고지론자가 많고, 저지론자는 후자의 저지론자가 많아 보입니다.
15. 야망을 가지고 고지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많습니다.그리고 그런 야망을 가지고 고지를 정복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상이 아주 강력하게 망가지고 있습니다.
16. 그러나 그런 야망을 가지고 고지에 도전하는 사람들 보다 비교도 안되게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야망을 가지고 고지에 도전을 하였으나 그 고지 도전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17. 확률적으로도 고지보다는 저지에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고지는 소수고 저지는 대다수입니다.
18. 대다수의 저지인 중에는 소수의 저지론자(소명을 가지고 저지와 미답지에 와 있는)와 다수의 그냥 저지인이 있습니다.
19. 그냥 저지인 중에도 두 종류의 저지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여 살았지만 세상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밀려나 저지인이 된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신이 게을러서, 도전 정신이 부족하여 저지에 처하게 된 저지인이 된 사람입니다.
20.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저지인들은 자신이 저지인이 된 까닭이 다 사회적인 구조 문제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제 보기엔 아닙니다.
21. 저지에 대한 소명이 없어서 저지에 가본적도 없고 저지에 갈 생각도 없는 사람, 고지를 지향했지만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한 사람,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있지만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었는데(실제로 뛰어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저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고지론 비판은 비겁한 자기 합리화일 수 있습니다.
22. 비겁한 이솝의 여우일 수 있습니다.
23. 고지론과 저지론은 평지에서 논쟁하면 자칫 말장난이 되기 쉽습니다. 정말 치열하고 비참한 저지 현장에서 현실감을 가지고 논쟁을 한다면 저지론과 고지론은(비겁한 저지론과 소명을 가장한 고지론 말고 진짜 저지론과 진짜 고지론) 꽤 유익한 논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4. 그러나 소명을 가장한 고지론자와 소명을 가장한 저지론자가 벌이는 논쟁은 그냥 자기 합리화 이상은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입니다.
25. 우리 평지에서 이러지 말고 그냥 저지에서 만납시다.
26. 여러분의 굿모닝을 오늘은 기도하렵니다. 어찌보면 지리한 논쟁에 지치셨을까봐. 여러분 굿모닝.
고지론과 저지론의 여러 종류를 알기 쉽게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많이 공감도 하고 저는 어느쪽일까를 비추어보며 읽기도 했습니다. 때론 이것도 되고 때론 저것도 되기도 하는 애매한 저를 보면서 아! 어느 한가지를 일관성 있게도 못 사는 나는 ‘짬뽕론자’이구나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습니다.
어떤 분이 예수님을 참 고지론자의 모델로 말하시는걸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지론자는 고지에 오를 능력으로 저지를 온통 관심가지고 사는 분으로 정의를 해도 되겠지요. 사실 성경에도 그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이 일은 요한의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사도행전 10장36-37절> 하는 부분입니다.
고지론자는 많은 능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소유’가 아니라 ‘관리’와 ‘운영’에 머무르는 사라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도 모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것을 가졌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세상보다는 천국을 받기를 원하는 가난한 사람말입니다.
하루 종일 햇빛 한번 들어오지 않는 지하방에서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반 지하 정도로 창이 있는 집들이 많지만 아주 예전에는 완전한 땅 속에 만들어진 작은 다세대빌라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겨울은 그런대로 살만하다가 여름, 특히나 장마철에는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바람 한 점, 햇빛 한 시간도 방에 들여 놓지 못하는 방은 온통 습기와 냄새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살던 시절을 잘 넘기고 창문이 달린 지상의 단칸방으로 옮긴 날 그 집으로 들어간 세 식구는 햇빛 들어오는 창문을 감격하여 눈물로 감사드리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단지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는 방이라는 이유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햇빛 들어오는 창문이 달린 집에서 살지만 그들이 모두 그렇게 감격으로 눈물흘리며 감사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그 가난함은 창문하나에도 행복이 넘치며 하나님께 다가갑니다. 정말 하늘나라가 그들의 가슴에 소유되었습니다.
가난한 심령, 즉 가난한 마음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 빈부에 상관없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것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냥 그래야지 한다고 생기거나 유지 되기는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 가난한 마음은 자기에게 의지하였다가 쓰라리게 절망해보았거나 그로 인해 자기를 믿는 것을 포기해본 사람만 가능한 마음입니다.
자기 능력, 자기 재능, 자기 인맥... 그 어떤 것으로도 꼼짝할 수 없는 구석에 몰려본 사람만이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인정하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실패와 죽을 만큼의 절망은 가난한 마음을 생기게 하고 유지하게 하는 힘이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능력 있고 부유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지 않고 가난한 갈릴리에서 시작한 이유입니다. 가난한 갈릴리를 잊지 않고 자기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만이 참 예수를 닮을 수 있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짜배기 고지론자가 아닐까 싶은 마음입니다.
위세 있는 예루살렘에서, 인정받고 머무르고 싶어 하는 고지론자 생각보다 많은 우리 개신교의 현실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재능있고 열심인 사람이 재능없고 게으른 사람보다 더 심한 피해를 세상에 끼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건 마음이 올바른 목표를 보지 않을 때입니다. 차라리 재능없고 게으르다면 한 사람의 피해에 그칠 것을 자기도 빗나가며 남도 빗나가게하는 악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재능은 없으나 열심히, 올바른 길에서 살고 싶습니다. 김동호목사님은 재능있고 열심히! 올바른 목표를 바라보시는 분으로 존경합니다. 예수를 닮아가시는 참 고지론자가 되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의 시선으로 힘을 얻는 초짜신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