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으로 2012. 3. 26. 17:09


‘선택‘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선택하는 것이고,
일생이란 선택의 집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성공과 이익을 위해서 공부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무언가 유익을 주려고 공부합니다.
배우고 얻은 소득의 20%-30%를 남에게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70%-80%를 남에게 주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성직자’ 혹은 ‘자선사업가’라고 부릅니다.
흔하지 않지만 100%를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별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100%를 남들을 위해 내어 놓는 경우도 있는데
그들을 ‘성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중에 어떤 삶을 살지는 순전히 선택에 달렸습니다.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여러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거나,
그것들이 계속 되는 동안에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 주변 사회,
심지어는 역사까지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로 갈라져갑니다.

여기 선택의 결과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지에 묻힌 무어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무어는 '백정 전도의 개척자'이자 '백정 해방운동의 조력자'로 칭해지는 인물입니다. 무어는 미국 매코믹 신학교 재학 중 언더우드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졸업 후 32세 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꾸준한 노방전도로 사람들을 모아서 곤당골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열었습니다. 학생들 중에 관자골에 사는 백정 박씨의 아들 ‘봉주리 (Pong Choolie)’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봉주리에게서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무어는 박씨를 여러 차례 위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무어가 외국인 한 사람을 박씨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바로 고종의 주치의 에비슨이었습니다. 에비슨은 여러 차례 왕진하면서 정성스럽게 치료해주었고 마침내 박씨는 완쾌되었습니다.
박씨는 왕의 주치의가 짐승 같은 백정을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였고, 세례를 받고 ‘성춘’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에 나오던 양반 교인들은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예배당 앞쪽에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졸랐습니다.
무어가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결국 이들은 따로 교회를 세우고 갈라졌습니다.
한편 신분차별에 설움 당하던? 많은 백정들은 복음 안에 차별이 없다는 무어와 박성춘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3년 후인 1898년 가을에 곤당골 교회는 분리되었던 홍문동 교회와 다시 합하여 백정과 양반이 함께 예배 드리는 중앙교회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백정교회로 불렀습니다.
이후 중앙교회는 1905년 8월에 예배당을 승동으로 옮겨 이름도 승동교회가 되었습니다.
장티푸스에 걸렸다 살아난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대의 전신)의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1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백정 신분으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던 무어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제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

1892년 32세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은 무어 선교사는
좀 더 안전하고 평안할 수도 있는 길을 두고
낮설고 외롭고 위험할 수도 있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나중에 일어날 엄청난 변화는
씨앗도 뿌려지지 못하고 사라졌을 겁니다.
그가 내린 선택은 이미 서원한 100% 남 주는 삶을
한 걸음 더 나간 실천이었습니다.

무어 선교사가 백정 박씨를 죽을 병에서 살린 후 교회로 데려 왔을 때,
당시 백정을 짐승과 동격으로 여기던 양반들은 같이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곤당골 교회와 결별하고 나가서 따로 양반들을 위한
홍문동교회를 세우는 선택을 했습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같이 받아들였다면 좋았을
영적 세계를 들어가지 못하는 선택이었습니다.

괴로워진 백정 박씨는 그런 상황에서 한 길을 선택합니다.
그저 무어 선교사에 대한 인간적 미안함이나
당시의 백정 형편을 감안한다면 스스로 교회를 안나오는 선택이
더 쉬웠을 수도 있는데 그는 서울은 물론 멀리 수원까지
같은 처지의 백정들에게 전도를 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선택으로 그와 자식들, 다른 백정들의 가족,
차후 사회적인 차별을 없애는 기적같은 변화가 왔습니다.
그의 선택 하나가 가져온 놀라운 결과...

3년이 지난 뒤,
따로 나갔던 양반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무어 선교사에게 돌아오는 선택을 합니다.
양반이라는 신분과 자존심을 유지하느라 그냥 계속 갈 수도 있던 길에서
참 성경의 뜻을 받아들이고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신앙, 그리스도교가 아니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를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정 30명의 곤당골교회와 양반 70명의 홍문동교회가 합쳐져
현재 인사동의 승동교회 전신인 홍무섯골교회라는
100명의 새로운 교회가 세워집니다.
나중 왕손인 이재형이 장로가 되고, 백정인 박씨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백정과 양반, 왕손이 하나로 모인 진정한 보편적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이 힘은 그대로 조선 정부에 탄원서를 올려
백정들이 호적을 가지는 해방을 보게 됩니다.
양반처럼 갓과 망건도 쓸 수 있게 되었고,
법률적으로 차별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마르다 헌트리 여사는 자신의 저서에
무어 선교사의 백정해방을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보다
적지 않은 사건으로 표현했습니다.

선택은 결과가 오는 뒷날에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순간부터 이미 영향을 끼칩니다.
누구보다 먼저 선택을 하는 당사자에게,
그것은 밝은 의욕으로 오기도 하고,
어두운 비굴함으로 오기도 합니다.
선택의 순간부터 우리의 영혼은
탄식을 하던지 기뻐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자질구레하게 보이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일생을 획을 그을 큰 선택까지
분명 선택 속에는 진실과 거짓이 함께 있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자기마저 속일수도 있지만
포장을 어떻게 하든 결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평안과 불안의 조짐으로 감지하지만,
계산과 욕망, 감정의 방해로 눈 감고 우기며 살아나갑니다.
하늘의 뜻을 찾는 기도를 하는 분들과,
마음이 깨끗한 찬양을 부르는 분들은 그것을 가려냅니다.
누구나 최초에는 모두 받았던 능력입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속지 않게 해주소서.
남들에게나 자신에게나,
혹 형편이나 운명으로부터도!

선택으로 내 영혼이나 양심을 팔지 않게 해주소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진심으로 나를 대해주는 친구들을 상처주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