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화현상, 바울의 다소, 나의 겨울...
‘춘화현상’
우리 눈으로 볼 때, 개나리와 목련은 봄이 돼 잎이 나오기도 전에 꽃부터 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에 말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꽃눈은 전년 가을에 잎이 떨어지기 전에 생깁니다. 그러므로 꽃이 잎보다 한참 늦게 핀다고 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개화에 필요한 온도 때문입니다. 겨울처럼 장기간 저온상태를 거쳐야 꽃을 피우는 특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정 기간 추운 날씨와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을 가리켜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하는데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춘화과정이 필요한 식물이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가을에 파종하는 보리의 경우 겨울을 거치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도, 이삭을 맺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튤립이나 백합도 추운 겨울을 견뎌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나바의 보증과 지원을 받아 사도들과 예루살렘을 여기저기 다니며 주님의 진리를 전합니다. 온 세상이 뒤집어지고 다시 태어난 바울이 타고난(잘못 잡은 방향이었지만) 열정으로
전도를 시작하자마자 접고 고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불과 보름만에..., 금의환양도 아니고 백수처럼 입 다물고 벙어리 삼년, 봉사 삼년, 귀머거리 삼년 서러운 시집살이처럼 지내러 간 것입니다. 절치부심! 백골분토! 죄를 갚고 이제사 참 진리를 전하며 살겠다는 가슴 설레는 의욕을 다 접고 고향 다소로 가야만 했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지금은 터키의 이슬람 문화 속에서 눈뜨고 간신히 찾을만한 바울의 생가, 황량하고 보잘 것 없는 그 고향의 바울생가는 참 인생의 초라함, 소멸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고향 다소는 상업의 중심, 화려하고 번화했으며, 지식인들이 대우를 받는 중심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도시에서조차 숨죽이고 패잔병처럼, 말없이 설치지 않고 살아야 했습니다.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자그만치 13년이나..., 스스로 포기한 것도 아니고, 바울을 잡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무서워 피한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음성이 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전 잘나가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를 경험하고 새로 눈뜬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명령은 그 어떤 것보다 사는 이유고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가라고 할 때까지 순종, 또 순종하며 기다렸습니다. 나중에 순교할 때까지 그 13년의 기다림과 인내가 얼마나 큰 훈련이 되고 변치 않는 겸손이 되었는지를 그때는 몰랐을 겁니다.
낮 동안의 병원생활이 해를 거듭할수록 두가지 현상을 부릅니다. 하나는 익숙해지고 어지간한 일은 다 경험해본 일들이 반복되는 경우라 많이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아무런 일도 없어도 내리막길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고 있는 느낌을 자주 가진다는 점입니다. 마치 막 꿈에서 깨어서 비몽사몽처럼 우울하기도 하고, 방금 무슨 안 좋은 통보라도 받은 사람처럼 이유 없이 불안하기도 한다는 증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면 병원과 아픈 사람이 보이지 않는 바깥으로 자유의 시간을 가지러 나갑니다. 온전히 혼자만의 새로운 감각, 분위기 속에서 우울함을 털어버리고 싶어서입니다. 4년을 넘어 햇수로 5년째 병원에서 24시간을 지내다보면 누구라도 올 수 있는 심적 증상이다! 스스로 달래면서...
어저께는 밤 열한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병원을 나섰습니다. 20분쯤 걷다보니 저만치 앞에 상당히 큰 규모의 단독건물 교회가 나타났습니다. 상가의 한 층에 입주한 교회가 아니라 기대를 가지고 가까이 갔습니다. 혹시 금요일 철야예배나 기도회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어서, 하지만 가까이 가서 잠긴 현관문을 보고 실망이 몰려왔습니다. 금요일 예배는 오전 10시 한번 밖에 없는 것으로 시간표가 안내전광판을 지나갑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진 교회 예배 시간들이 실감이 났습니다. 그 길로 허전해진 마음을 달래려고 아파트 뒤편에 만들어진 뒷동산 등산길을 두 군데나 뺑뺑이를 돌며 다리를 혹사하고 내려왔습니다. 걷는 내내 찬양을 들으면서 우리네 인생은 지금 바다 한가운데 어디쯤을 떠다니고 있을까를 그려보았습니다. 망망대해에 언제 어디서 폭풍이 오는지, 왜 우리가 이 한가운데로 흘러왔는지, 언제쯤이면 땅을 보고 정박을 할지...
‘춘화현상’ - 추운 겨울을 넘기지 않으면 꽃도 결실도 맺지 못하는 법칙, 열매가 달려도 적은 수확밖에 못 얻기도 하는 자연법칙,
‘바울의 고향 다소’ - 자신이 가진 재능이 어떠하던지, 어떤 결심을 하고 생명을 다 바치겠다는 각오를 하던지 상관없이 더 완벽하고 더 깊은 뜻을 가진 분의 명령에 죽은 듯 따르는 믿음, 그가 고향에서 13년을 백수처럼 죽은 듯 지낼 때 주위 사람들과 다른 잘나가는 유대인들의 비웃음과 수모는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요? 그래도 묵묵히 따른 긴 시간, 그 순종
‘기약이 없는 희귀난치병 투병’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쯤 바로 잡힐 것인지 아무런 전망도 보장도 없는 병원 유목민...
모든 엔딩은 이미 정해져 있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야 어떻게 달라보일지라도 긴 생명의 본질과 결말 법칙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그 어떤 자리로!
이제 남은 것은 겨울을 견디고 살아낸 개나리 백합 보리 등의 타고난 순응처럼, 예수님의 음성에 철저하게 죽어버린 사람처럼 순종으로 견딘 믿음의 바울처럼, 나와 아내, 우리 보통 사람들도 무엇인가 그 기다림을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끝이 어디인지,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결산을 할지 안다고 해도, 아는 것으로 모두가 무사히 온전히 도달하는걸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갈수록 세상을 지나가는 일이 어려워지고 망가지는 경우가 더 많아질까요? 정신적 스트레스로 많은 심각한 병에 걸리기도 하고, 자살, 중독, 남을 해치거나 자신을 해치거나... 독일의 한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 교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영악해졌다”고 지적합니다. “금지, 명령을 통한 착취에서 이제는 ‘너는 할 수 있다’를 주입시키는, 자유를 통한 착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타인착취’를 하다가 한계에 다다르자 ‘자기착취’를 만들어낸 겁니다.”
또 이렇게 말 합니다 “타인착취에는 한계가 있다. 주인(회사 등)이 없어지면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자기착취에는 한계가 없다.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이런 자기 망상 속에 함몰된 인간은 피로해 쓰러질 때까지 일한다. 피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누적되는 ‘피로사회’의 일원이 된다. 스스로 주인이 돼 삶을 영위하지 않고서는 일하는 것도, 쉬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의 노예의 일상일 뿐이라는 게 한 교수의 시각입니다.
그럼 피로는 어떻게 푸나. “‘나인(Nein·아니요)’이라고 말하라”는 게 함축적인 답. ‘긍정’을 ‘부정’해야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해를 끼치고 있나’ 하는 것을 인지하는 게 문제를 풀기 위한 출발이다. 라고 말 합니다.
어느 분의 말처럼 세상의 원칙이 자꾸 사람들을 올가미를 맵니다. 남들이 하는대로 해야 정당하고, 남들만큼 살아야 유능하고, 남들에게 떨어지지 않아야 안심을 한다고 우리를 끝없이 세뇌하는 세상의 원칙, 그러나 이것을 부정해야만 자유를 얻고 쉼을 얻으며 피로를 벗어난다는 요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겨울을 만나거나, 주위에서 비웃는 상황에 빠지면 견뎌내기 힘들어하고 우울증에 빠집니다. 그것의 배경에는 자기를 보는 기준이 남들의 시선, 남들의 수준인 자를 대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잘 넘기고 더 많은 열매를 맺거나 더 완전한 훈련된 삶이 올거라는 믿음보다는 말입니다. 그 생각이 더 궁지로 몰아넣고 더 견딜 수 없도록 힘들게 합니다.
‘가나모리 우라코’라는 한 일본 작가는 자신의 어떤 실수를 호되게 나무라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꼭 해결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만약에 계속해서 ‘너 참 못났어’ ‘능력부족이야!’ 이렇게 몰아세우면 대놓고 말하던지 하다못해 속으로라도 ‘난 못난 인간이 아닙니다’ 혹은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키우겠습니다’하고 반박하랍니다. 이것은 반발이 아니고 자신에 대한 선언이랍니다. ‘바보’라고 하면 ‘난 바보가 아니야 너와 생각이 다를 뿐이야’ 라던가, ‘죽어버려!’하면 ‘네가 그런다고 내가 죽을 것 같니? 난 그렇게 무르지 않아!’하고 응수를 하라는 것입니다. 즉 ‘바꿔 말하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선언을 해주는 중요성을 이야기 합니다. 진심으로 나를 위해서 말해주는 사람은 결코 낙담시키거나 좌절하게 하면서 말하지는 않는답니다.
사람은 DNA를 담은 세포 하나가 분열하여 둘, 넷, 여덟, ... 그렇게 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몸에는 그렇게 늘어난 세포가 약 60조 정도의 세포가 존재한답니다. 그 모든 세포는 모두 자기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면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몸을 지탱합니다. 다치거나 줄어들면 또 채우고 회복시키면서, 우리의 몸속을 흐르며 산소와 영양분을 날라 살게 해주는 혈관은 미세혈관까지 하면 약 10만 키로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긴 혈관들이 심장박동으로 펌프질하여 온 몸 구석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보급관 노릇을 합니다. 그런데 제각기 알아서 유지하고 버티고 일하는 이 세포들이 마음이 겪는 스트레스로 병이 납니다. 심각해지면 변비 설사, 위장병, 더 나쁘게 오랜 스트레스는 암을 유발하고... 그래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결국은 총체적으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최후에는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그래서 이 60조나 되는 세포와 10만키로의 혈관들의 건강을 위해서 마음이 잘 버텨주어야 한다고 위 작가는 말합니다. 세포들아 너희를 지켜줄께! 나는 바보가 아니야! 자기 선언을 하고, 주체적으로 세상의 원칙이 아닌 하늘의 원칙을 따라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면서 말입니다. 그래야 겨울이 지나갈 동안 살아날 것이고, 수난의 기간도 견딜 것이며, 투병이 끝나던 , 혹 이대로 가더라도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면서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춘화현상’ 우리는 봄이 오면 부활할 것이고, 더 많은 꽃을 피우며, 영원히 살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겨울을 지나고 유배되어 쓸쓸히 살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