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가는 길/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

말은 꽃입니다. 삶이라는 뿌리에서 자라는!

희망으로 2012. 3. 9. 10:05

바나바는 원래 이름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워낙 섬기는 일에 열심이라 그는 사도들에게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나바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는 자기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내놓고 언제나 물질로 몸으로 봉사할 일을 마다않고 살았습니다. 그가 애써 개척했던 교회로 바울을 불러 거의 넘기다시피 한것도 그의 평상시의 삶의태도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나바의 행적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결실은 바로 그의 말 이었습니다.

바울이 아직 사울일 때, 다메섹에서 눈이 멀고 주님을 만나 회심을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사도들과 예루살렘의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오히려 변한 그의 전도를 가장 믿어준 것은 배신한 바울을 죽이려고 지독히 쫒아다닌 예전의 유대교 무리들이었습니다. 긴 날들을 숨어지내고 고향에서 고행을 하고 예루살렘에 온 바울을 사도들은 여전히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계속 그를 믿지 않고 거부하였다면 오늘날 기독교의 상당부분 바탕이 된 신약성경과 이방교회들은 애당초 안개처럼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 중대한 가름길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숱한 봉사와 오랜 신뢰를 얻은 결실이 바로 바나바의 바울 보증이었습니다.

'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 사도행전 9장 27절'

그 이전에 26절에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하던 상황이 27절의 바나바의 전하는 말을 지나서는 이렇게 변했습니다. 28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로! 우리는 이 반전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쳐야 합니다. 아주 예전에 시골 극장에서 고전하던 주인공이 악당을 상대로 반전하여 싸움을 이기기 시작하면 관객들이 자기도 모르게 모두 박수를 치면서 기뻐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세련되고 많이 영악해지기전 순박할 때의 일들입니다. 이 일들이 충분히 인류의 승리를 위한 반전임을 인정한다면 박수를 받을 만한 극적 순간입니다.

바나바의 오랜 삶의 결실이 사도들을 설득하는 '전하니라'에 고스란히 피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뿌리는 그의 오랜 생활 평가에 있습니다. 만일 그가 바울과 같이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잡으러 다닌 사람들이었거나 잡혀가는 예수 추종자들을 외면하며 사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사도들이 그의 말을 믿어주었을까요?

아내는 나를 위해 오랫동안 정말 애를 쓰고 날마다 봉사를 해주었습니다. 변변찮은 댓가를 받으면서도(그건 적은 생활비와 몰라주는 무뚝뚝함을 모두 포함해서) 늘 불평 없이 묵묵히 살아주었습니다. 그것을 오랫동안 모르다가 어느날 가슴에 날아 온 화살처럼 아프게 박혔습니다. 마치 심봉사가 눈을 번쩍! 뜨게되어 딸을 본 느낌처럼, 그래서 그 날 이런 글 한편을 썼습니다. 편지도 아니고 시도 아닌 미안함을 표하느라...


아내에게 14 -

찬바람이 부는 새벽마다
당신은 고단한 몸을 일으켜
잠결에도 부엌으로 걸어갑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과
세상 모든 아내들이 다 그런다 해도
언제나 그것은 고마울 뿐입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 당신의 공양입니다.
날마다 그것은 말이 아니고
실천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언제쯤 단 하루라도
이부자리 속에 누워 있게 하고
내가 대신 할 날이 올까요 .

나는 언제나 실천이 아니고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이 글 하나를 쓰고는 또 외면한채로 십년을 더 받아먹기만 하다가 결정적으로 미룰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누운채로 사지가 마비되어 원하지 않아도 보상을 돌려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발적으로 갚지 못하니 운명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씻기고 먹이고, 속옷을 빨아서 입히고, 밥과 음식들, 물조차 입에 먹여주는 누군가가 박수를 칠지도 모르는 역전의 순간이, 그러나 억울하다 생각되지 않고 오히려 이제부터는 내가 갚는 날이 왔다고 기꺼이 감수합니다. 진심으로 억지가 아니고 예전 20년 동안 나를 보살펴준 은혜를 갚는다 싶어서 아내에게 죽어도 20년은 살아서 받아주어야 하다고 다짐을 받곤 합니다. 이런 결심은 아내가 아무리 돈이 많거나 누군가 다이아몬드 같은 명언으로 권해준다고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아내의 지난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삶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바나바의 설득처럼!

언젠가(작년 9월말이던가?) 이 정부의 대통령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말한 것이 뉴스를 통해 전국으로 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지지자들조차 속으로는 좀 민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저울이 있거나 판정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상식적인 느낌이 그랬던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경에 '의인은 없다!'고 못을 박아 놓았는데 '도덕적으로 완벽??' 이라니... 사실 능력과는 별개로 그다지 도덕적으론 높은 점수를 받기는 좀 거리가 있지 않았나 싶은데 말입니다,

그래서 말은 화려하게 할 수도 있고, 천하를 주무를수도 있는게 세치 혀지만 오랜 역사를 통과하면서는 모두 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뿌리, 삶의 공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2천년 기독교의 운명이 갈라지는 분수령에 한 사람의 말이 있었고, 그 말의 뿌리에는 오랜 성실한 삶이 있었습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사역도 남기지 못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나바를 다시금 떠올려봅니다. 지금의 넘치는 말들, 화려한 명함들, 건물들 온갖 외형적 성공과는 좀 다른 뿌리를!

그건 누구나 할 수있지만 아무나는 하지 못하는 진실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어쩌면 '하지 못하는'이 아니라 '하지 않는'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