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것이 허상??
눈에 보이는 것이 허상이다??
주일날 속병이 나서 침대신세를 못 벗어나는 집사람 덕분(?)에
인터넷으로 100주년 기념교회 생방송예배에 동참했다.
예배를 드리는 중간마다 터진 웃음 때문에
당연히 드리는 안식일 예배 외에 즐거운 마음을 덤으로 받았다.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우신 이재철 목사님 대신
‘남을 낫게 여기라’ 는 제목으로 정한조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실상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상일까요?
당연히 눈에 보이는 것들이 실상이지 않나? 생각이 들었는데
예로 들어주신 이야기를 들으며 모두 생각을 바꾸는 분위기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도하고 결혼도 하는데
여자는 남자가 좋은 대학 졸업장도 있고, 대기업 다니는 사원증도 있고
타고 다니는 멋진 자가용도 자기의 앞날에 행복을 보장해줄 든든한
실상 같아 보였단다.
남자는 여자가 퀸중의 퀸처럼 잘생긴 코에 진한 눈썹, 멋진 옷맵시등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실상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작 결혼하고 나서는 달랐다.
행복을 기대한 남자에게서 무너지게 하는 건 그 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었다.
성질은 급하고 수시로 터지는 화, 게으르고 술과 도박은 왜 그리 좋아하는지,
전자제품들에는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나쁜 습관들,
결혼 전에는 행복의 조건으로는 끼지도 못할 허상으로 보이던
성격, 가치관, 습관 등...
정작 그것들이 행복을 좌우하는 실상들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기껏 반했던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보니
오똑한 코도 없고 진한 눈썹도 없었다. 그게 실상이었는데...
그 대목에 교인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거의 여자분들 에게서!
잔소리에 못 견디고 옷값에 감당 못하고 바깥으로 2차 3차 돌다 들어오게 되니
행복을 보장하는 실상은 눈에 보였던 게 아니라
안 보인다고 무시했던 것들이 사실은 실상이었다는 말씀.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을까?
‘서로의 짐을 져주라’에서 짐은 ‘각자 자기의 짐을 지고’에서의 짐과는
다른 짐이라고 하셨다.
서로 져주는 짐은 혼자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말하는 것이고
자기의 짐을 지고 따르는 짐은 혼자서도 가볍게 들 수 있는 짐을 말한단다.
그런데 자기가 질 수 있는 짐도 안지는 사람은 남에게 짐이 되는 사람이란다.
서로의 짐을 지는 교회공동체는 빈부, 귀천,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남을 낫게,
훌륭하게 보아야 가능하다.
할인매장에서 가끔하는 균일가 판매 옷 코너는 과거 얼마짜리였든지 상관없이
같은 한 가지 가격에 팔리는데 이유는 아주 작은 거라도 하자가 있기 때문이란다.
실밥이나 재단이나 혹은 부분변색, 아무 이상이 없는 경우도
유행이 한참 지나거나 제 사이즈를 셋트로 내지 못하는 경우 등이란다.
무슨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는 사람이 베풀 듯 고개를 숙이는 겸손으로
서로 낫게 여기거나 짐을 같이 지는 게 아니라
사람은 모두 한 가지 이상 흠이 있어 같은 형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한다고 했다.
목사님께 초등학생 아들이 있는데 한번은 시험을 앞두고 이런 이야기가 오갔단다.
시험공부를 전혀 안하는 듯한 아들에게 은근히 걱정도 되고 화가 나서,
“시험공부는 안하냐?”
“안해요!”
“야, 시험 범위도 알려주고 시험날짜를 알려주는 건 공부해서 시험보라는 뜻이잖아?”
“시험은 평상시 실력으로 보는 거지요!”
“........”
더 화가나고 속이 부글 해지신 목사님이
“야! 그럼 왜 시험 날자와 범위를 알려주느냐고!”
“걱정마세요, 10등 안에는 들테니까요”
“니네반 다해봐야 30명도 안되잖아?”
“그러니까 10등안에 들면 잘하는거지요!”
“.......”
꾹 참고 설득으로 들어가려고
“아빠 어릴 때는 시험 못보면 매를 맞았어.
점수가 나쁘면 그만큼 더 많이 맞고“
“시험 못 보는 게 무슨 죄예요? 매를 맞게!”
“...........”
“시험 못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어요?
그리고 시험 점수 나쁘고 기분 좋은 사람 어디있어요?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목사님은 자기와 아이가 36살 차이라고 했다.
자기가 공부도 더 많이 했고 더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이가 하는 말이 틀린 게 없어서 말을 못했다며 다시 생각하셨단다.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며 아이를 참 바르게 잘 키우셨다는 생각을 했다.
높은 점수, 일류대학, 많은 것을 가진 것만 최고이고 최선으로 아이를 가르쳤다면
그런 넉넉하고 많은 낮은 것들을 이해할 품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겉모습 얄팍한 것들을 붙들고 살아가기 십상일거다.
자기보다 낮은 점수의 친구는 허접해보이고, 가난한 사람은 천해보일지도 모른다.
아님 더 똑똑하거나 더 많이 가진 사람 앞에서는 스스로 기가 죽을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허상을 붙들고 살다가 행복하고 자유로워지는 실상은 놓치는 거다.
겸손은 낮은 곳이라는 뜻의 단어였단다.
예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고
그리고도 죄인들이나 매달리는 십자에까지 내려가셨다.
겸손의 본질은 바로 그 모습이라서 우리가 내려갈수록 예수를 만날 수 있다며
그것은 억지 겸손이 아니라 흠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보이는 허상에 매달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실상에 매달릴 때 가능하다고 하셨다.
예수를 만나는 곳, 그 기쁜 자리 겸손으로 내려가면 서로 짐을 져주고
자기의 짐은 자기가 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단다.
교회가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